성탄은 기다림, 분리, 그리고 사랑이다. 올 성탄을 기다리며 그 의미를 새겨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탄은 기다림이다. 대림절(Advent)은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다. 이는 중세 567년 로마 가톨릭 중앙의회인 타우어 의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강하다. 금식하며 기다리길 권장했다. 그 이전 누가는 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Anna)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섬겼다고 전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영으로 기다린 것이다.
필자가 어릴 적,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교회에 가곤 했는데, 12월이 되면 성극을 준비하러 주중에도 교회에 갔다. 밤늦게 돌아올 때면 여학생들을 골려주는 재미가 참 쏠쏠했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순 우리 캐럴을 부르며 다녔다. 어두운 밤 두려움이 찾아올 때면 찬양했다.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기쁘게 기다리는 절기는 성탄절이다.
둘째, 성탄은 분리(Secession)이다.
20C 전후로 아방가르드 운동이 전개된다. 당시 비엔나 문화예술계는 물론 사교계도 과거 전통양식으로부터의 분리가 화두였다. 건축가 아돌프 루스는 ‘장식과 죄악(Ornament and crime)’을 주장하며 모든 설계에 장식을 배제하므로 지탄을 받았지만, 빈 세제숀 정신은 그룹을 형성하며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베토벤과 견줄 만한 구스타프 말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알프레트 아들러, 건축가 오토 바그너와 마리아 올브리히 등 현대사회에 영향을 준 비엔나의 인물들을 세어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독일의 바우하우스 1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 역시 알마 말러와 교제하면서(후에 두 번째 남편이 되지만)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아 결국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국제주의 양식에 기초를 놓는다.
과거 양식과의 분리는 모더니즘(Modernism) 건축을 여는 도전이었다. 다원주의 사회는 인간성 회복에 집중한 나머지 절대진리에 대해 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있고, 진리를 거부하니 경계가 무너지고 정체성이 상실돼 욕망과 쾌락과 권력이 무성하다. 다시 분리해야 할 때가 왔다. 무엇보다 죄로부터 분리해야만 성탄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다. 성탄은 마라나타(Maranatha) 예수 오심을 소망하게 해줄 것이다.
셋째, 성탄은 사랑이다.
기도할 때면 으레 머리에는 말씀을, 가슴에는 사랑을, 왼손에는 온유와 겸손을, 오른손에는 경건과 절제를, 양발에는 예수 성실의 도를 걷게 해달라고 아뢴다. 머리로만 지식화된 말씀이 사랑으로 실천되는 계기가 있었다. 1998년 필자가 남서울대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다. 공동설립자인 화정 공정자 총장과의 만남이 하나의 시작이었다. 공정자 총장은 호주머니에 항상 휴지를 넣고 다니면서 점심시간 길에 떨어진 꽁초나 웃자란 풀을 뽑았다. ‘작은 실천으로 큰 사랑을 실천’하고자 전공과 연계한 작은 사랑을 제안했다. 부족한 나는 이를 전도와 예수사랑의 실천이라 보고, 그 중심에 서서 교내는 물론 해외로 확산시켰다. 2003년부터 대한적십자사와 ‘65시간 사회봉사 공동인증제’를, 인도네시아 모슬렘 마을에 MCK(마을공동화장실, 우리 교단 최광수 선교사님과 함께) 건축을, 그리고 국내 취약계층을 위한 주거환경개선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이런 나눔에 동참한 믿지 않던 대학생들이 캠퍼스 세례를 받았다. 청년세대들은 성공한 기성세대로부터 꿈을 찾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전공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을 섬길 때 비전(예수)을 발견하는 것 같다. 받기에 익숙한 나 같은 장로가 그 습성을 버릴 때 비로소 내안에 사랑의 예수님이 계신다.
2022년 한 해 절망 중에도 소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동행해주셨기에 가능했다. 소외된 이웃과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닦아주시길 아기 예수께 기도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죄와 분리하고 작게나마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올 성탄을 맞이하고 싶다.
정건채 장로
<남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동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