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의 생활신앙] 크리스마스, 노엘, 축성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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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유익만 좇아가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일평생 죄에서 나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죄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유일한 구원의 길, 하늘을 버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의 이름을 듣게 된 것이 지상 최대의 은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의 역사 속으로 아주 가까이 내려오셨다. 이제 우리는 ①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면 그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사 45:22), ② 사랑의 눈으로 그를 보면 그와 더불어 만족을 얻는다(행 7:56), ③ 인지(認知)의 눈으로 그를 보면 그를 경배하게 된다(요 20:16), ④ 봉헌(奉獻)의 눈으로 그를 보면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아 5:16), ⑤ 영적 이해의 눈으로 그를 보면 그와 함께 견디어 낼 수 있다(히 12:1-2), ⑥ 실재(實在)의 눈으로 그를 보면 그 안에서 기쁨을 얻게 된다(요 20:20), ⑦ 소망의 눈으로 그를 보면 거룩한 열심으로 충만케 된다(디도 2:13). 그러나 편견으로 인해 장님이 되거나(왕하 5:11) 세속적인 것에 도취되어 있거나(눅 21:34) 그릇된 오류에 빠져 있거나(딤전 1:10) 사단에 의해 좌우될 때(눅 22:31-34) 교만에 사로잡혀 있을 때(딤전 3:6), 자아에 갇혀 있을 때(요삼 1:9), 시기와 질투에 동요돼 있을 때(행 13:45)엔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계셔도 알아채거나 느끼거나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우리 인류의 그리스도(메시아/구원 제사를 드릴 대 제사장)로 보내주셨고, 그분은 우리 앞에 오셨다. 그러나 구원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인격과 안목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엎어 놓은 그릇 위에 비가 내리듯이 한 방울의 물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첫 번 크리스마스 때 구약의 예언(예수님의 탄생지에 대한)을 줄줄 암송하고 있었던 서기관은 정작 예수님이 태어난 시간에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지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했다). 외국에서까지 경배 사절단으로 찾아온 천문학자들의 전갈을 받았지만 경배 대신 그를 없애버릴 계략을 시도한 헤롯왕 역시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한 국외자(局外者)였다. 비록 마구간이긴 했지만 자기 집 울타리 안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는데도 여관집 주인과 가족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맺지 못했다. 그러나 밤이슬을 맞으며 양들의 안전을 지키느라 눈뜨고 밤을 지새던 저 시골 목장의 청년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고, 경배도 드렸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Glory to God in the heavenly heights, Peace to all men and women on earth who please him). 가장 가까이 있던 목동들이 경배를 했는가 하면, 멀리 떨어진 외국(페르시아)에서 온 천문학자들도 예물을 드리며 예수의 그리스도 사역을 증명해주었다(황금은 왕중왕/유황은 예언자/몰약은 제사장 되심을 의미한다고도 함). 왜 구주 예수는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 화려한 곳을 택하지 않고 시골의 베들레헴을 탄생지로 택하셨을까? 구약 예언의 성취도 있었지만, 양들을 잡아 그 고기를 소비하고 즐기는 곳보다 양을 기르고 돌보는 목장에 더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구약 곳곳에 예언이 되어있었고(사 7;14, 11:1. 미 5:2) 신약에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마 1:22-23).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지며 요셉은 예수님의 육신적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이요 어린 예수의 보호자(양육자)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의 혈통에 속한 자였다. 마태복음(1장)의 족보는 요셉의 계보이고, 누가복음(3장)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로 추정된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이 알려주었다고 기록했다(눅 2:8-14). 원로교인인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가 예수님의 탄생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확실히 보통 인간의 출생과는 달랐다(요 1:14/롬 8;3).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도 스스로 자기의 독특한 탄생을 언급하지 않았다. 마가는 예수의 탄생을 생략했고, 요한은 선험적인 맥락에서 다루었으며 바울은 다시 사신 예수만 언급했다. 마태와 누가만이 예수의 탄생과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 역사 속에 와계시는 것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 14-15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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