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 나이를 모두 滿으로 계산하도록 정해주어 전 국민이 한살이나 두살 젊어지게 됐다고 고마워한다. 지난 달에 9순 생신 턱을 내신 교회 선배께서 잔치를 내년에 한번 더 해야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하면 나이를 먹고 죽음에 다가가는 데 대한 생각이 점차 무겁게 찾아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이라고 햄릿은 읊조리지만 그 말에 담긴 고뇌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사는 것이 즐거운데 유한하니 문제다. 푸른 하늘이 좋고 그 아래 멈춰 있는듯 흐르는 한강물이 편안하고 좋다. 강물을 따라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 함께 나누는 얘기들이 재미나고 같이 먹는 음식은 뭐가 됐건 맛이 있다. 전철을 바꿔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다소 지루하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남자와 여자, 혼자 또는 동행이 있는 승객들을 가만히 살펴보는 재미는 열차 속의 무료를 덜어준다. 집 현관 문을 들어설 때 거실이나 주방에 있는 아내가 ‘어서 오세요’하는 소리도 듣기 좋고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책상 앞에 앉는 순간의 안도감도 좋다.
은퇴 후에 10년 넘도록 일간신문에 기고하던 칼럼도 지난 달에 스스로 그만 끊었고 이제 의무감으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국장로신문에 짧은 글 한 토막을 보내는 일은 무슨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부담감도 없다. 그저 세상만사 가운데 어느 순간 떠오르는 단상에다 배경이 되는 사실관계를 더하고 단순한 의견을 붙여 결론을 내면 그만이고 신문을 읽은 교회 장로님들이 공감을 표해 오시면 그것이 바로 고마운 보상이 된다. 그러면서 이 굳어진 머리에서 무슨 쓸 만한 것이 나오겠나 하는 겸손 아닌 自省의 소리가 가끔 마음속으로부터 울려온다.
직접적인 창조, 생산 활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삶이라도 나의 생명이니 소중하다. 이대로 가면 좋겠는데 이것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 남은 시간이 대체로 얼마나 될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건강상 기준이 이것 저것 나와있지만 저는 예외가 될 것이라고 자꾸만 생각한다. 인생의 종말이 암흑의 공간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믿으니 큰 두려움은 없으나 지금 중요한 문제는 오히려 죽음 이전의 내 모습이 어떠할까에 걸려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 끝에 죽음을 맞는 것을 보는데 나나 아내나 그런 식이 아니고 바람에 촛불이 훅 꺼지듯이 죽음의 다리를 쉽게 건너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장수시대’에 살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나이까지 고쳐주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히스기야 왕처럼 대략 15년의 여생을 더해 받는 셈이다. 인생의 추가시간이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같이 결정적 가치를 지니게 되면 좋겠는데 지난 15년 동안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의 날들이 그냥 그렇게 지나가 버려서는 무의미하다. 그래도 우리의 수명을 늘려 주신 하나님께 보답하는 길은 교회가 가르쳐주는 대로 그 귀한 시간에 감사와 사랑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라, 무엇을 더 이루려 고민할 게 아니다.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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