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강남 삼성동 한국전력공사 본사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날 회사 근처 교회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영화로도 소개되었던 유명한 시각장애인 목사님의 간증집회 안내였다. 이미 이분의 영화를 통해서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했다. 시각장애인 목사님의 간증 시간 내내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첫째는 그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깊은 감격이 있었고, 둘째는 나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집회를 마치고 나온 내게 마음을 크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건강한 몸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신입 직원이었던 나의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에다 재형저축(주택부금)을 떼고 나면 간신히 한 달 한 달 버티는 상황이었다. 마음은 간절한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아 안타까웠다.
그 당시 나는 태스크포스(Task Force) 팀에서 늘 늦게까지 야근을 하곤 했다. 그래서 부서에서 매달 월급 외에 3만 원씩을 특별수당으로 주었다. 3만 원을 받는 날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된 것 같은 풍성함이 있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잠실에 방 하나가 있는 7.5평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3만 원을 받는 날은 제대로 가장 구실을 하는 것 같이 뿌듯함이 있었다. 먼저 과일가게를 들러서 아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양손에 가득 사서 들고 가곤 했다. 그래서 늘 이날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집회를 다녀온 뒤 3만 원을 받은 날,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생각났다. 그러나 가족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행복감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3만 원을 후원했다. 한동안 마음에 허전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앞으로 좀 더 많이 후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처음 3만 원을 후원한 뒤부터 내 마음에는 어떻게든 좀 더 많이 후원해야겠다는 간절함이 솟아났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바람대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후원 금액을 늘려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몇 년 뒤, 뉴질랜드에 유학을 가면서 앞으로 후원할 수 없을 상황을 생각해 100만 원을 보냈다. 그 당시 유학을 떠나는 내게 가장 큰 문제는 재정적인 문제였다. 아무 후원 없이 자비로 신학대학에 유학을 가는 내게 100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실제로 뉴질랜드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동안 재정 문제는 매일 내 마음에 큰 바위가 짓누르는 것 같은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은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늘문을 열어 주셨다.
지금까지 수억 원을 후원하게 하셨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올 때 노후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수원에 조그만 아파트가 재건축이 되어 고가의 아파트가 되었는데 이것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기증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비록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같은 3만 원이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 주셨다.
이은태 목사
뉴질랜드 선교센터 이사장
Auckland International Church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