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가져다준 엄청난 변화는 우리의 생각과 상상력을 능가한다. 당장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수가 급감하고 교회에 대한 충성도도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누가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로 문을 닫은 교회가 1만3,000여 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인수가 줄어들었다는 보고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교회의 미래는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 대형교회는 대마불사일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누가 가장 먼저 가장 확실하게 하는가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위기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핀란드의 노키아(Nokia)와 코닥(Kodak)의 영광과 몰락은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전세계 핸드폰의 선두였던 노키아와 아날로그 필름의 대표 주자였던 코닥의 몰락을 기억해야 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거부할 때에 일어나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중세교회의 시대를 교회의 암흑기라 부르는데 그때만큼 교회가 잘나가던 때도 없었다. 그 후 교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역사는 교회의 몰락에 대해 증언한다.
교회가 개혁을 거부하면 문을 닫고 말았다. 서구 유럽의 교회가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그곳에 교회의 건물은 존재할지 모르지만 교회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듯 오늘의 한국교회 예배당도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건물만 웅장한 교회의 미래는 상상하기조차 싫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쳤다. 교회는 위기를 맞았다.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바라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다. 과거의 교회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래의 교회는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를 묻는 새로운 교회운동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의 열심을 강요하는가?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강조하는 이유는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우리 교회는 평일은 열심히 일터에서 일하고 그 속에서 살라 한다. 헌금도 강요하지 않는다. 헌금도 결국 믿음의 문제이니 자신들의 믿음만큼 하면 될 일이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을 따로 갖고 있지 않다. 몽골학교 강당을 빌려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우리 교회가 좋다. 기존의 교회와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교인들 중 나의 목회에 불만이 있는 이가 있다면 그런 것도 하나의 차별성이라며 받아들이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목회자가 싫증나면 떠나라 했다. 거꾸로 목회자가 떠나는 것이 좋겠다면 나 또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싶고 내가 갖고 있는 목회철학과 영성에 합당한 목회를 하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인 것처럼 우리도 보이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내용이 있고 의미가 있는 공동체로 남고 싶다. 차라리 게으른 목사로 남고 싶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