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춘원의 첫사랑, 화가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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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성격도 좋아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진달래 시인, 김소월의 아버지와도 친구로 잘 지내면서 자신의 딸을 김소월네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벽초가 김소월 시인의 장인이라는 사실이다.

벽초는 1945년 이 나라가 해방이 되어 좌우 분열이 심각해지자, 이것을 막아 하나가 된 민족 국가를 수립하고자 무척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이 잘 안되자, 1948년 벽초는 자진 월북하고 만다. 그는 북한에 가서 부수상에 올랐고 얼마 후 과학원 원장을 지내고 나중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까지 오른다.

1950년 6.25 때 춘원 이광수가 납북되어 함경북도 선봉군 만포까지 끌려가 지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멜 때, 벽초는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직접 찾아가 춘원을 문안 위로하며 옛정을 나누는 장면을 우리는 뒷부분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동경삼재 중 두 사람이 만나서 그때 나눈 대화는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까.

아무튼 한말 시대적 변화와 함께 동경삼재들도 제각기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지난날을 추억해 보면, 모두 역사의 흐름이었고 그들만의 운명적 신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수양동우회(修養同憂會) 사건과 

春園의 변절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한 춘원은 허영숙의 성화에 못이겨 그녀와 정식 혼인을 했다. 얼마 후 그는 종학원(宗學院) 교사로 초빙되어 철학, 논리학을, 경서학교와 경신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개벽’ 5월호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다.

또 이 무렵 춘원은 단편소설, ‘할멈’, ‘가실(嘉實)’을 집필했고 인촌 김성수, 송진우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연재했으나 그 내용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아 곧 중단한 바 있었다.

그리고 춘원은 1926년 1월, 수양동우회 발족에 참여하고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이어 그는 동아일보에 주옥같은 많은 그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마의태자’, ‘단종애사’, ‘혁명가의 아내’, ‘이순신’, ‘흙’ 등 실로 놀라운 열정으로 글을 썼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고 1933년 8월에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언론사에서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정치는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이 크게 문제되면서 춘원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춘원의 신상에 많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앞부분에서 상세히 언급된 문제의 ‘도쿠도미’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시로 찾아와서 집요하게 춘원을 협박, 공갈, 회유했다. 

“춘원! 더 늦기전에 결심해라! 자네 조선 똑똑한 지식인 인재들 다 절단난다. 다 죽어!” 도쿠도미의 협박 공갈은 너무나 집요했다. “…….” 춘원은 여전히 말이 없다. 도쿠도미는 더 강도를 높여 회유와 공갈 협박으로 춘원을 코너로 몰고 갔다.

“자네! 정신 좀 차려! 이제 시간되면 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조수들로부터 다 죽어! 도산 안창호부터 심한 고문에 다 죽어. 이 바보야. 우선 살고 봐야 할 꺼 아냐?” “…….”

그래도 춘원은 말이 없다. 미동도 보이지 않는 춘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도쿠도미는 오늘도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 오늘도 그냥 가지만 잘 생각해 봐! 장난이 아니야. 내가 지난번에 보여 준 1급 비밀문서 살생부 블랙리스트는 팩트야. 대일본제국의 조선인 말살정책은 진짜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돼!”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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