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김재원 장로 공적비 세워
제주도 해안선 따라 여러 교회 개척
이기풍 목사는 평양사람이었다. 당시 교세가 가장 강한 곳이었다. 평양에서 제주에 대한 후원이 많았다. 이선광 여자 선교사 후원도 평양 여전도회가 맡았다. 이기풍 목사가 1913년 휴식하는 동안에 선교비가 끊겼는데 이선광 선교사가 다시 제주에 올 수 있도록 후원을 받았다.
또 강병담 숭실대 학생이 평양노회의 후원으로 이기풍 목사와 제주선교를 했다. 강병담은 후에 순천지역에서 목회했다. 목포에 있는 마율리(줄리아 마틴) 여선교사가 제주에 와서 제주 여성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보고 제주 여성들의 삶을 돕기 위해서 이재순 여선교사를 파송했다.
당시 제주교회가 전라 노회 소속임으로 여러 가지로 제주를 도왔다. 이기풍 목사의 약한 몸을 걱정해서 전라 노회는 1914년 산북 지방은 이기풍 목사, 산남지역은 윤식명 목사에게 맡기기로 하고 윤식명 목사를 파송했다. 윤식명 목사는 모슬포교회에 자리를 잡고 모슬포 인근의 모든 교회를 목회했다. 이때 함께 온 김영진 영수가 크게 도왔다. 이러한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이기풍 목사가 잘 해냈다.
1915년 최대진 목사가 휴식하러 제주를 떠난 후 이기풍 목사를 대신해 제주에 왔다. 그는 자비량으로 목회했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는 오지 못하고 1916년 이기풍 목사는 광주 양림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53년 교단 분열로 기독교장로회 측은 서부교회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은 성안교회가 되었다. 성안교회 뜰에는 2008년 100주년 기념비와 이기풍 목사와 김재원 장로의 공적비가 있다.
조봉호는 일찍부터 한학을 배웠다. 한양에 가서 경신학교와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는 중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했고, 주변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며 금성리에서 기도 모임을 했다.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에 도착한 후 신앙과 교육으로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일꾼이 되었으나 제주 성내교회 조사였던 1919년 5월 독립군자금 모금을 주도해 체포되고 대구교도소에서 수감 중에 순국했다. 사라봉 자락에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제주의 인물로 그를 기념하는 ‘순국 지사 조봉호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기풍 목사가 새벽기도 가서 아침 식사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딸 사례가 가보면 강단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여러 교회를 세웠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