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느보산에서 120살에 죽었다. 아니 사라졌다. 그가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인지 하나님이 아예 그의 시신을 천국으로 옮겨가셨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요한 것은 모세의 죽음에 대한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죽음 뒤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마지막 욕망일지 모른다. 거대한 무덤을 만든 이집트의 파라오와 중국의 진시황제 같은 이들을 보면 그렇다. 북한의 김씨 부자는 자신들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만들어 놓고 모든 인민들이 자신들이 죽은 이후에도 무덤을 바라보며 숭배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무덤을 보면서 남은 자들은 죽은 자를 소환하고 때로는 숭배한다.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세의 죽음은 특별하다. 그는 무덤은커녕 시신조차 찾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자신의 죽음을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모세의 그런 결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 목적지는 모압이 아니라 요단 건너 가나안이었다. 그러므로 모세가 모압에 무덤을 만들었다면 그 백성은 모세의 무덤을 숭배하느라 모압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무덤을 떠나지 못했다면 가나안에 들어가려던 계획은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모세의 뜻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 숨기며 자신의 백성이 가야할 곳으로 떠나도록 인도한 지혜로운 지도자였다. 흘려보내는 자가 이긴 것이다. 떠나갈 곳으로 가는 것이 마땅한 자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욕망을 위해 무덤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모세의 처신은 우리가 닮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는 성을 쌓지 말고 길을 만들라는 유목민의 명제이기도 하다. 800년 전 칭기즈칸도 그랬다.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무덤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저 몽골 초원의 영웅은 모세처럼 자신의 무덤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어야 한다. 무덤이 없으면 어떠하랴? 남은 자들이 그의 무덤을 대신해 추모할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무덤이 아니다. 무덤보다 돌아가신 이의 사랑과 마음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아있는 자들이 그의 믿음과 삶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 장로님이 돌아가신지 어느덧 9년이 되었다.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그리움은 더 깊어진다. 나는 때때로 아버지와 함께 나누고 살았던 시간을 반추하고 기억하며 그 시간을 즐긴다. 내가 죽어 내 아들이 나를 그렇게 기억하고 소중한 시간들로 기억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감사한 것은 아버지 장로님의 유분을 묻은 소나무 밑 조그만 비문을 아들이 썼다. 지금은 장성해 변호사가 된 아버지 장로님의 손자가 평생 농군으로 사셨던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비문을 만들었다.
“땅을 보듬어 사람을 키우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던 그 거친 손 여기 소나무 되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