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고발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제자 유다였다. 유다는 예수의 애제자 중 한 명이었다. 어쩌면 가장 신뢰받은 제자였다. 베드로 같은 이들은 어부였으므로 예수의 사랑은 받았을지언정 중요한 일을 맡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유다는 지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으므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제자 공동체의 재정을 맡았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돈과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맡기지 않는 법이다. 유다는 예수의 측근 중 최측근이었을 것이다.
그런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배신감이라니?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이유는 예루살렘의 해방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메시아니즘으로 충만했다. 그들은 해방공동체의 이념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정치 군사적 강자였던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며 살아온 그들은 유월절 즉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그날 거사를 일으켜 로마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랐지만 정작 예수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비정치적이며 비군사적인 평화주의자였다. 아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무능한 예수로부터 제자들이 받은 충격과 배신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3년여를 따르며 예수를 통해 해방을 바라던 제자들에게 보여준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해방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숙원이었고 그 이념은 반드시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에 유월절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 모두에게 허탈함과 멘붕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유다의 배반에 돌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그런 유다의 이념과 욕망으로 예수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은 모든 질병에서 치유되며 세상의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는 욕망의 신앙관이 그날 유다의 배반을 추동했던 이념의 신앙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바라는 예수와 예수가 살아 보여주신 모습은 다르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욕망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길은 다르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신앙과 예수의 본질이 과연 동일한가를 묻고 의심할 필요가 있다. 만약 교회가 가르치는 욕망의 신앙과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다르다면 오늘 우리도 유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이미 우리는 유다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저 무지한 군중들처럼 말이다.
교회가 성이 되고, 사유화되었으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포기했다면 오늘 우리는 분명 그 교회를 의심해야 한다. 과연 유다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한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