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 요즘 이런 마음으로 새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도 끝이 보이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 왔지만 우리에게 전해오는 소식은 어느 것 하나 반갑고 희망을 주는 것이 없으니 우리 마음에는 아직도 지난 겨울의 한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시가 지난 백여 년간 온 세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도 이런 정서가 아마도 오늘의 한국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엘리엇이 1922년 장편 시 『황무지』를 발표할 당시 1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스페인독감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고 생명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이런 무력감을 더욱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이런 시인의 마음을 사치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같은 범속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고 썼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두꺼운 옷을 벗어 버리는 그것만 해도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띄우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봄이 오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필자도 피천득 선생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가 엘리엇을 사치스럽다고 한 것은 아마도 세상의 복잡한 정치와 경제가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런 정서가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상적인 욕망과 걱정과 근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화사한 꽃향기와 훈훈한 봄바람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을 꾸짖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 피천득 선생은 자신이 범속하다고 했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기가 참으로 어렵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의 걱정거리에 마음을 다 빼앗긴다. 장바구니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이 또 기준 이자율을 올린다고 하니 환율이 오르고 물가가 덩달아 오를 것이 걱정된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하는 것도 걱정이다. 그 통에 세계 경제가 위축되고 수출이 안 되니 대기업의 주식이 떨어져서 투자해 놓은 펀드가 걱정된다. 그뿐이랴.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는 것도 불안하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장기전이 되어서 혹시나 핵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도 걱정이 된다.
코로나 팬데믹은 끝나가지만 세계 경제는 언제 회복될지 요원해 보인다. 여기에다가 정치는 또 어떤가. 여야의 극한대립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거칠게 하고 거의 내전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걱정이 끊이지 않는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피천득 선생의 주장이야말로 사치스럽게 보인다. 세상에 이렇게 걱정거리가 많은데 한가롭게 봄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사치스럽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부신 봄의 향기가 이렇게 우리를 유혹할 때는 못 이기는 듯이 일상의 모든 걱정 근심을 다 내려놓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보는 사치와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봄의 찬란함 앞에서도 여전히 걱정과 근심을 안고 사는 것이야말로 사치스럽다고 한 피천득 선생의 주장이 우리 마음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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