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맹회는 똑같은 이념으로 결성된 평양의 ‘동우구락부’와 통합해 ‘수양동우회’로 1926년 재편되었다. 이어 1929년 ‘수양동우회’는 독립운동 단체인 ‘흥사단’과 통합, ‘동우회’로 개칭되었다. 춘원은 결론적으로 이 ‘민족개조론’에서 민족의식 개조의 요체를 8개 항목으로 집약했다.
이와 같이 춘원의 폐부를 찌르는 듯 들춰 낸, 한민족의 치부는 이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로 전락케 된 도덕적 타락상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지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자학적이었다는 데서, 그는 한민족의 열등성을 떠올려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합리화했다는 비판과 오해도 받았다.
그렇지만 춘원이 지적해 낸 한민족의 도덕적 타락상은 있는 그대로였고 그로부터 70여 년이 더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민족개조론’의 개조대상들은 대부분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요목으로 상존하고 있다.
‘민족개조론’은 한민족의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 없이는 민족적 증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간절한 호소였고 순수한 피맺힌 춘원의 절규였다. 춘원의 이 개조론에는 그가 1930년대 후반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던 친일적 색깔은 전혀 없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오직 한민족의 정신적 타락상에 분노하고 터트리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한 옥고였지만, 당시 춘원은 이 논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심한 오해를 샀다.
이 글이 발표되자 흥사단 소속 애국 청년들이 발칵했다. 우리 민족성을 어떻게 보고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가? 조선의 열등한 민족성으로는 당장 독립하는 것이 시기상조이니,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한다는 춘원의 주장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춘원의 효자동 자택에 떼를 지어 몰려들기도 했다. 금방 일을 낼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집안 안마당까지 청년들은 쳐들어갔다.
그중에는 흥분한 어느 청년은 춘원을 요절낼 거라고 시퍼런 칼까지 들고 있었다. “춘원! 어서 나와라. 민족의 반역자 어서 나와 칼을 받으라!” 한 청년이 칼을 들고 핏대를 올려 소리를 지른다. 겁을 잔뜩 먹은 아내 허영숙은 어린 아들 영근이를 가슴에 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여보! 나가지 말아요. 쟤들이 제 정신이 아니오. 칼을 들고 있어요. 절대 나가지 말아요!”
그러나 춘원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러고는 안방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앞마당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 나갔다. 심약하기만 했던 춘원이 이런 용기도 있었다니 허영숙은 참 놀랍기도 했다.
이렇게 춘원이 과감히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당 가운데로 걸어 나오니 떼를 짓고 있던 청년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여러분! 우리 집에 잘 오셨소. 내게 불만이 있는 모양인데, 추운 마당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방안에 들어 와서 자초지종 얘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칼은 소 잡는데 필요하지 뭣하러 들고 있소?”
춘원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춘원은 당당하게 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칼을 든 청년이 무안한 듯, 들고 있던 칼을 마당 화단방향으로 던져 버린다. 일행은 언제 소란을 피웠나 싶게 금방 조용해지며 앞서 가는 춘원을 따라 모두 얌전하게 안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춘원이 방안 가득히 둘러앉은 청년들을 주욱 둘러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머저 말해 보시오! 뭐가 불만인지….” 그러자 리더로 보이는 턱수염 청년이 큰 기침으로 목을 세워 말했다. “개벽 5월호에 실은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성을 크게 모욕주고 멸시하고 있소. 춘원 선생은 민족에 대한 긍지도 없소? 논문에서 말하는 8개 항목은 명분은 있어 보이지만, 조선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의 내용은 결국은 일제 무단정치에 순응해야 된다는 의미로만 해석이 되고 있어요. 즉 조선독립운동은 아예 하지 말자는 말 아닙니까? 결국 일본에 협조하자는 매국행위 아니오? 솔직히 말해 보시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