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개구쟁이 (1)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의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나는 1928년 6월 1일, 정주군청 소재지 읍에서 서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농촌마을 정촌에서 태어났다.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약 5리를 가면 서해가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그리 높지 않은 봉오산이 자리한 곳이었다. 해주 정씨가 약 150호 정도 모여 살던 문중 마을로, 사람들은 허암공의 사당을 세워 그의 후손임을 자부하며 살았다. 마을에서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은 김씨 삼 형제뿐이었다. 근처에는 일본 사람이 간척지를 막아 만든 서수농장이 있었고, 그곳은 해마다 많은 양의 쌀을 생산해 냈다. 마을은 큰길을 중심으로 지형상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보산동’이라는 이름을 두고 사람들은 지금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반모루 정촌’이라고 불렀고, 특히 큰길 서쪽은 ‘내동’이라고 불렀다.
아버지 정재규님은 원래 농사를 짓던 분으로 자작과 소작을 겸하셨다. 아울러 농장에서 벼를 사서 소매상들에게 파는 중간 도매상인 미곡상도 하셨다. 친어머니는 산후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내가 첫돌이 지나자마자 돌아가셨고, 내가 대여섯 살이 되던 무렵 아버지에게 시집을 온 새어머니가 그 이후로 쭉 나를 기르셨다. 어머니는 세 명의 동생들을 낳으셨지만 안타깝게도 홍역 등의 질병으로 모두 어려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나는 무매독자로 외롭게 성장했다.
마을에는 서당이 있었지만 앞마을에 신식 유치원이 생기자 서당은 자연스레 서쪽 내동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천자문 대신 동요를 배우며 유치원을 다녔다. 유치원 졸업식에서 돌돌 만 졸업장을 양손으로 쥐고 나무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9살이 되어서야 집에서 20여 리 떨어진 남호동에 있는 부호소학교에 진학했다. 일제 식민지의 내선일체 정책으로 소학교를 초등학교로 개명하는 바람에 졸업할 때는 초등학교 명의로 졸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시골학교에도 일본인 교사가 여러 명 배치되어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린 시절 나는,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극성맞게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소문난 개구쟁이였다. 친구들과 동네 형들과 논에 나가 참게를 잡거나 바다 물밀 따라 망둥이 낚시를 즐겼다. 또 가을에는 친구들과 같이 콩밭에서 콩을 뿌리째 뽑아 튀겨 먹기도 하고 과수원에 가서 과일을 훔쳐 먹기도 했다. 특히 당시 나의 호기심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상여였다. 그때는 상여가 나갈 때 만장이 보통 50장 정도 나가는데 그것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간 적이 많았다. 호상에는 두 시간 정도 걸려야 상여가 마을을 떠날 정도로 의식이 장엄하고 화려했다. 그것을 보며 뭔가 알 수 없는 신비로움과 환상적인 분위기에 취해 흥분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화려하기라면 시골의 회갑잔치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을 어른들은 회갑 때면 으레 기생을 불러 잔치를 벌이곤 했다. 시골에도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장손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들의 회갑잔치 때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볼거리들이 펼쳐졌다. 여러 가지 민속춤은 말할 것도 없고, 해금, 퉁소, 징, 꽹과리 등 온갖 전통악기가 동원되어 어디서도 쉽게 구경하기 힘든 전통예술을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일
이런저런 기억들 중에도, 유독 생생하게 기억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다섯 살 무렵, 먼 친척이 집에 놀러와서는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는 나를 보며 “얘가 엄마 없는 앤가?”라고 물었다. 생모는 아니지만 사랑과 정성으로 나를 키우시던 어머니가 있는데도 그는 나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게다가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맞장구를 치며 “응, 얘가 내가 안아서 젖 먹여 키운 애야”라고 했을 때, 나는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아프다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여덟 살 때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분가를 하여 새로 집을 짓게 된 날이었다. 하루 종일 목수 옆에서 일을 도우시던 아버지가 물을 길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항아리를 들고 50미터를 걸어 마을회관에 있는 우물로 갔다. 그런데 물을 퍼 담다가 그만 두레박으로 항아리를 쳐서 물동이가 깨지고 말았다. 아쉽고 속상한 마음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아버지는 내 말을 곧이듣지 않으셨다.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랬지? 그런 거지?” 그리고는 작대기로 내 엉덩이를 세게 때리셨다. 단 한 대였지만 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다. 실수로 항아리를 깬 것도 속상한데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만 돌리는 아버지가 야속해서 아버지에게 맞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왔다. 갈 곳이라고는 집 근처가 전부인 어린 나는, 유치원 뒤에 있는 허암공 사당 뒤에 숨어 밤늦게까지 울었다. 참을 수 없는 억울함이 가슴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런 나를 찾아온 분은 어머니셨다. 여전히 씩씩대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나를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시며 달래셨다. “봉덕아, 아버지한테 한 대 맞고 뭘 그러냐. 그만 가자. 어서 일어나라.” 그 다정한 목소리에 못 이기는 척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던 날도 생각난다. 학교가 많지 않고, 또 대부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들 먼 곳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던 때였다. 나도 매일 20리를 걸어갔다 걸어오곤 했다. 책가방 대신 책보를 메고 장갑 대용으로 토시를 쓰는 시절이었다. 겨울엔 토끼털 귀마개를 착용했지만 그래도 오가던 길에 도저히 추위를 이기기 어려우면 볏단을 쌓아 세워 둔 곳에 들어가 잠깐씩 몸을 녹이곤 했다.
6학년 때는 아끼쯔끼 도끼오라는 일본인 선생님이 ‘노꼬리 벵꾜’라고 해서 요즘의 보충수업과 비슷한 특별 수업을 열어 중학교에 진학할 아이들만 따로 모아 밤 9시까지 공부를 시키셨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달빛을 받으며 공부를 했는데, 문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혼자서 어두운 밤길을 걸어야 하는 것 자체로도 무서웠지만, 가장 큰 두려움은 ‘엉고개’라고 불리던 고개를 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곳은 호랑이가 나온다는 것으로 유명한 고개였다. 겁이 많았던 나는 혼자서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때로는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전력 질주를 하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매일 밤 겁에 질려 그 고개를 넘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도 마중을 나오지 않으셨고, 나는 그것이 몹시 서운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날도 역시 두려움에 떨며 엉고개 중턱까지 왔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너 봉덕이 아니가.” 아버지는 추위를 견디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자 마치 그때까지 눈물을 참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는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 겨울밤, 그 자리에 서 계신 아버지를 보고서야 그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