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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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개구쟁이 (3)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신기한 것은 철없이 뛰어 놀면서도 내게 형제자매가 없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특공대를 가고 싶은 학생은 손을 들라는 선생님의 말에 특공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손을 들까 말까 고민을 했다. 결국 손을 들지 않았던 것은 내가 무매독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특공대라 불리던 그것이 ‘가미카제’ 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행한 시대 탓에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전쟁에 던져져야 했던 어린 청년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던 철부지 시절부터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 번의 이별

1944년 봄,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아버지는 겨우 47세였는데 탈장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요즘이야 탈장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 정주읍에는 겨우 두 명의 의사가 있었고, 탈장을 치료할 기술은 없는 시절이었다. 아버지를 정씨 문종 묘지에 묻고 나자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린 심정이었다. 텅 비어버림과 동시에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묵직한 무언가가 열일곱 소년의 가슴을 눌렀다. 그것을 철이 든다는 말로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 휴학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1945년, 우리나라는 8.15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나는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에는 매우 기뻤다. 둘째 사촌 형에게서 그 소식을 듣고는 꼴 베러 논에 나간 첫째 사촌 형에게 뛰어갔다.

“형, 일본이 망했대! 우리나라가 해방됐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마구 떠들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철학도 역사관도 뚜렷하지 않은 철부지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민족혼과도 같은 정신이 살아있었던 것 같다.

사실 학교를 쉬는 동안 사촌 형은 늘 나를 격려했었다. “봉덕아,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형의 그 말은 내게 커다란 용기와 위안이 되었고, 배움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바로 그해에 선천상업학교에 복학을 했다. 해방이 되었으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고, 공부에 대한 기대도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혼란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의주 사범학교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선천보성여중학교로 이전하여 합병되었고, 소련군의 무자비한 행패가 자행되는 소문은 계속 퍼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은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제작한 민청가를 가르치며 부르게 했고,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마을의 분위기는 바뀌었고, 마을사람들은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어린 중학생으로서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못한가로 구분할 뿐이었다. 당시 북쪽에서는 남쪽 방송을 듣지 못하게 하여 나는 선천 신민당사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통해 남쪽의 소식을 듣곤 했다. 남쪽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한다는 것부터 우리의 자유가 박탈당했음을 느꼈고, 몰래 듣던 남쪽의 상황은 내가 있는 곳과는 매우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서 자유롭고 안정된 사회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사범학교에 다니는 친척 명근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울로 가서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 같음을 알게 되어 우리는 월남을 결정했다. 어머니는 3년간이나 다닌 선천상업학교의 졸업장이라도 받고 가라고 하셨지만, 남북한의 대치국면이 심상치 않았기에 졸업장을 주는 7월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사촌 형은 가족들이 흩어져 살다 보면 누군가는 살아남게 된다는 말로 내 뜻을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물으셨다.

“봉덕아, 가면 언제 올 거니?” 

“7월에 미국, 소련 공동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니까 회의가 잘되면 금년 안으로 다시 오게 될 거예요. 아니면 아마도 20년 후에나 오게 되겠죠.”

내가 ‘아니면 아마도’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년 후에나 오게 될거라는 말은 그렇게 오래 걸릴 리 없다는 의미였는데, 20년은 커녕 분단 70년이 되도록 아직 고향땅을 자유롭게 밟지 못하고 있다. 친척으로부터 어머니가 1988년 1월 북한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친척 중에 일본 오사카에서 도루코 회사를 운영하는 분이 있었다. 그는 38선이 생긴 후에도 두세 차례 북쪽을 드나들며 친척들의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마을 위원장에게 볼펜이나 손목시계 등을 공수해 갖다 주는 그를 북쪽에서도 막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물어보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는 친척들을 돌아보던 중에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그에게 북쪽에 남아 있는 사촌형들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월남 후 소식이 끊겼으니 내 생사를 알 길 없던 사촌 형들은 친척을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알고 편지를 보내왔다. 그렇게 소식이 닿은 사촌 형들과 여러 차례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너무나 늦어버린 통곡의 편지를 북쪽으로 보냈다.

어머님 영전에

어머님, 봉덕이는 불효막심한 자식임을 자책합니다. 제가 좀 더 서둘렀으면 어머님께 편지 드릴 수 있었는데 서두르지 못한 것이 불효입니다. 어머님, 용서를 빕니다.

사촌 봉호 형은 저에게 어머님께서 자식에 대한 애타는 애정을 가지시고 가정과 집을 고수하신 삶을 말해 주었습니다. 형님께서 보내주신 반모루 덩촌 엉골집에서 찍은 어머님 진갑 잔치의 사진도 보았습니다. 아버님을 일찍 먼저 보내시고 외로운 삶의 길을 걸으시는 어머님의 깊은 마음을 철없는 자식이 헤아리지 못하였음을 깊이 후회합니다.

어머님, 어머님 영전에 가서 사죄의 큰 절을 드릴 날을 고대하면서 난필로 통곡을 대신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불효에 대한 죄스러움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자유를 향한 걸음

1947년 5월 1일 사촌 형님이 여비로 쓰라고 3천 환을 주었다. 선천 신민당 당사에서 알게 된 친구가 돈을 숨기라고 해서 구두 뒤축을 파 돈을 숨겼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나는 명근이와 함께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오게 되었다. 명근이와 나는 기차를 타고 먼저 평양에 도착해 그곳에서 일박을 한 후, 황해도 해주로 가서 소련군 트럭 운전수에게 운임을 주고 동평양을 떠났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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