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생명의 길을 따라 온 걸음 정봉덕 장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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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개구쟁이 (4)

  정봉덕 장로는 1927년 생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군대시절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60여 년간 주의 신실한 종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썼다.

  총회전도부 간사를 시작으로 총회 사회부 총무, 공주원로원 원장, 한아봉사회 설립, 생명의 길을 여는 사람들 등을 설립했다. 남은 생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동평양 내무서에서의 첫 검문수색을 무사히 통과해 한시름 놓고 있는데, 신천역에 도착하기 전 트럭 운전사가 ‘이곳은 내무서 검문수사가 심하니 자신이 없는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걸어서 어디까지 오면 자동차를 대기하고 있겠다’고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나는 두려운 마음에 즉시 차에서 내렸고 명근이는 자신 있다며 화물차에 남았다. 그런데 명근이는 대기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운전수에게 사자 단추를 단 학생은 어찌 되었는지 물어 보니 내무서로 연행되었다고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더욱 두렵게 한 것은 해주읍 도착 전, 인원이 많으니 팀을 나누어서 38선을 넘어가야 한다는 어느 중년 아저씨의 말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가장 어린 나를 꼭 데리고 가 달라고 간청했고, 그는 대신 자신의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앞뒤 가릴 것 없던 나는 그 짐을 지고 38선을 넘어 5일 새벽, 개성 부근의 청단역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다음 날인 5월 6일, 개성 수용소에 입주해 쉬고 있는데 나를 찾는 명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달려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물으니 내무서원이 4명 있었는데, 트럭 한 대가 도착하자 두 사람이 나가고, 또 한 대가 도착하자 두 사람이 나가서 그 사이 내놓았던 증명서를 가지고 뒷문으로 그곳을 빠져 나와 해주에서 배를 타고 월남을 했다고 했다. 그의 용기와 기지가 감탄스러웠고, 무엇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개성 수용소에서 검사와 휴식을 마치고 12일 서울에 도착하여 나보다 먼저 서울에 온 9촌 아저씨가 기거하는 회현동 성도교회 옆에 있는 향산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월남할 때의 소지품이라고는 세면도구와 입고 있는 학생복, 그리고 3천 환이 전부였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9촌 아저씨는 우리를 같은 일터에 취직시키려고 노력하던 중 면직을 당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많은 생각 끝에 남대문시장에서 빵 장사를 시작했지만, 불량배들이 빵 판을 엎어 자신들이 키우는 셰퍼드에게 내 빵을 주는 일이 생기자 겁이 나 그만두었다.

그해 가을, 시내에서 선천상업학교 동기인 최근형을 만났다. 선천여중학교 교사였다가 광주서중학교 교사로 가 있는 분에게서 광주로 오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며 함께 광주로 갈 것을 권했다. 애초에 월남을 결정한 것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기에 나는 친구와 함께 광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날 저녁, 화재로 학교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우리를 불러 주셨던 선생님이 숙직당번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일로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느라 결국 우리는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친구는 부모님이 계시던 서울로 돌아갔고, 나는 친척의 도움으로 서림 방직공장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했다.

1948년 10월 여수 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군인을 모집한다는 광고에 나는 1949년 1월 15일 군대에 지원했다.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멀고 가까운 곳에 폭음 소리가 가득 찼다. 한강 인도교가 파괴된 것이었다. 1950년 6월 28일, 한강을 건너려던 나를 포함한 육군본부에 잔류했던 군인 약 10여 명은 한강으로 향하지 못하고 차를 돌려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육군본부로 돌아온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밤을 지세웠다. 과연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는가, 이대로 우리는 죽는 것인가, 지금쯤 바깥 상황은 어떨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6.25의 비극은 그렇게 한반도를 삼켰다.

아침이 되자 일선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5사단 참모장과 정보참모와 그 일행들이 돌아왔다. 부상자들이 운송되고 모두의 움직임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참모장을 따라 다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서빙고로 가니, 이미 1천여 명의 군인들이 강변에 도착해 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배 한 척이 난민과 군인들을 태우고 출발하려는 것을 본 나와 운전수는 참모장과 정보참모를 모시고 서둘러 배에 올라탔다. 선주는 배가 무거워 뒤집힐 위험이 있다며 운행을 거부했고, 자신을 대동청년 단원이라 밝힌 동승자가 “그럼 당신이 내리라!”며 선주에게 큰 소리를 쳤다. 그제야 선주는 못 이긴 척 배를 움직였다. 전투기가 아닌 정찰비행기가 서울 상공을 선회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많은 군인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가슴을 쳤다. 나중에 듣게 된 것은, 배에 함께 타지 못하나 장 하사는 강을 헤엄쳐 건너편에 있는 배를 끌고 와서 최 중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태워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강을 건넌 군인들은 시흥에 집결하여 새롭게 부대를 정비하였고, 5사단 사령부 군인들은 광주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얼마 후 육군본부의 지시를 받은 이소동 소령은 사단사령부와 15연대 잔류병으로 독립대대를 편성하여 대전으로 출동하였다가, 새로운 지시를 받아 포항 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 소총 실탄이 귀 위로 날아갈 때는 “웽” 소리가 나고 귀 밑으로 날아갈 때는 “쉭” 소리가 난다는 것을 체험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소리와 공기가 두 귀를 건드린다.

육군본부에서는 다시 우리 대대를 3사단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우리는 영덕, 강구에서 북한군과 싸웠다. 안강 지역 부대의 거듭된 후퇴로 우리도 영덕을 내주고 포항까지 후퇴하게 되었을 때, 연대장 김석원 대령이 최전선으로 찾아왔다. “22연대 용사들아 힘차게 싸워라!” 산을 울리던 그의 외침은 피곤과 두려움으로 약해진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이즈음 웬일인지 사단 재정부 사병들이 최일선까지 와서 봉급을 지급했다. 북한군의 대공세 시점에 최일선에 온 재정부 사병들은 자신들에게 병기가 없다는 두려움에 수통에 담아 온 막걸리를 보이며 우리에게 수류탄과 바꾸자는 협상을 했고, 우리는 막걸리를 받아 마셨다. 그러다가 북한군 탱크 두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되어 어쩔 줄 모르고 헤맨 힘겨운 일도 있었다. 그 두 탱크 중 한 대는 우리 탱크가 부수었고, 다른 한 대는 포항 근처 비행장에서 출격한 전투기가 격파했다.

우리는 포항시를 내주고 형산강 제방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영천 안강이 무너져서 병기를 소에 싣고 구룡포 방향인 서남쪽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일부를 막기 위해 측면사격을 강행하였다. 동해에 정착 중인 함포가 북한군이 진을 치고 있는 형산강 강북제방을 따라 북한군을 계속 명중시키는 것을 본 군인들 모두는 크게 감탄했다.

곧이어 맥아더 장군의 지휘에 따른 인천상륙이 성공하여 남하했던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리 군은 사기충천하여 북진을 계속했다. 우리 군은 38선을 넘어 통천읍을 무혈로 점령하고, 이어 원산시에도 무리 없이 진입하였다. 원산시 점령으로 우리는 특진 보상을 받아 나는 이등상사로 진급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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