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미학] 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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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지휘자의 반주와 세계적 가수의 노래. 이러한 세기적 유명인들이 아침 일찍부터 TV에 초청되어 대담에다가 반주와 노래까지 곁들였으니 음악을 좋아하는 순희로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이 유명한 분들이 저녁 7시 반에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한다니 현장에야 가지 못할망정 TV만은 만사를 제쳐놓고 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8시가 훨씬 넘어서야 온 식구들이 저녁밥을 먹었을 것이지만 오늘은 닭 몰듯 야단법석을 떨어가며 서둘러서 여섯 시에 모두가 저녁식사를 마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밥을 먹었어야 할 순희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서너 번 수저만 들었다 놓았을 뿐이다. “조용히들 해!” 하도 윽박지르는 바람에 애들은 아예 일찌감치 뿔뿔이 자기 방으로 흩어져 가버리고 나머지 식구들만이 숨을 죽여가며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렇게 되기까지에는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을까 저 나이에 하고 싶은 것도, 보고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오죽이나 많았으련만 그 모든 것을 참고 음악에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니….’ 순희는 세삼 인간의 능력에 대해 놀라는 마음이었다. 음악회는 우레와 같은 만장의 박수로 막이 내렸다.

순희는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저런 천재들이야말로 그 재간이 아까운데 늙지를 말고 부디 오래 오래 살아서 온 세상에다 우리나라를 빛내야지….’ 이 생각 저 생각에 좀처럼 잠이 오지를 않았다. 어쩐지 배가 허전했다. ‘내가 밥을 먹었던가?’

갑자기 배가 고팠다. 이대로는 도저히 그냥 잘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큼한 김칫국에다 전기밥통에서 서너 주걱 밥을 퍼 말아먹었으면 꼭 좋을 것 같았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늦었는데도 들어가 자지 않고 아들 며느리가 소곤소곤 이야기가 끝이 없으니 답답한 것이다.

‘이젠 좀 들어가서 잠이나 자지 허구한날 같이 있으면서 무슨 말이 저렇게도 많담!’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고 심지어 화장실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까지도 들려왔다. 

순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한 컵 마시겠다는데 그게 무슨 시어머니로서 위신이고 체면이고가 상관이 있겠는가! 

“어머!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어머니?” “응 목이 좀 컬컬해서….” 하기야 배가 출출해서 밥 한술 먹으련다며 웃어 넘길만도 한데 한 다리 건너 며느리이고 보니 아무래도 딸과는 같지 않은게 사실이다.

“어머니 우유를 한 잔 드릴까요?” 며느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순희에게 물었다. 순희는 움찔했다. 마치 숨기려다가 들킨 사람처럼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글쎄….” 우선은 체면치레로 엉거주춤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요 예쁜 것 어떻게 내 마음을 고렇게도 잘 알아 맞춘담. 그래! 어서 한 잔 주려무나 하며 반기고 있었다. 

‘우유를 가져오면 받고나서 무슨 말을 해도 해야지 체면 차린답시고 실속없이 말하다간 죽도 밥도 다 틀리는게야’ 순희는 들고나온 우유를 냉큼 며느리에게서 받아 들자 입을 열었다. “물이면 되는걸 우유는 무슨….” “아니에요, 어머니. 저녁밥을 너무 일찍 들어서 그런지 저도 배가 고픈걸요….” 순희는 입가로 번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애어미라는게 마음은 아직도 어린애들 같으니… 순진하긴.’ “그럼 밥을 들지 그랬어?” “아니에요, 어머니. 저희들은 우유 한 잔씩 들었어요.” 순희는 웃었다. 그리고는 우유를 죽 들이켰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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