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불행한 죽음과 영광스러운 죽음

Google+ LinkedIn Katalk +

고린도후서 4:1-11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나’라는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가족들한테서 멀어지고 명예로부터 멀어지고 권력과 돈으로부터 멀어져서, 외로운 공동묘지에 땅 한 평을 차지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제일 불안하고 듣기 좋지 않은 단어가 있다면 죽음이란 단어이다.

한세상 살면서 어떻게 해야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문제이다. 세상에 왔다가 어떻게 죽느냐는 중요한 문제이고, 불행한 죽음이냐 영광스러운 죽음이냐도 중요한 문제이다.

불행한 죽음은 참 비참하다. 대통령으로서 영광을 누리다가 경우에 합당치 않은 사건이 드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대통령의 죽음은 참 불행하고 망신스러운 죽음이다. 모 대통령은 국가 지도자들을 미얀마 아웅산에 데리고 가서 북한의 테러 공격으로 대한민국의 노른자위 같은 지도자들을 죽게 했다. 이 죽음은 안타깝고 아쉬운 죽음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시에는 발포 명령으로 수백 명이 아까운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죽음은 비참하고도 억울한 죽음이다. 이렇게 죽이고도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그는 인류에게 비난과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세월호 침몰로 희망의 새싹처럼 돋아나는 학생들의 죽음은 참 애석하고도 아까운 죽음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영광스러운 죽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구원과 진리와 복음 전파를 위한 영광스러운 죽음도 있다.

주후 2세기 초 안디옥 교회를 담임한 이그나티우스 주교가 있다. 그는 믿음이 돈독하고 인격이 훌륭해서 성도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 황제의 핍박이 심하게 몰려왔을 때 맨 앞에서 성도들의 신앙을 독려하다가 박해자들의 손에 붙잡혔다. 본보기로 사형 선고를 받고 원형 경기장에서 사나운 들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지기 위해 로마로 끌려갔다. 그는 끌려가면서 자기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이제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그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그를 구명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이그나티우스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즉시 구명 운동을 중단해 달라고 편지를 썼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편지를 받는 대로 저를 위한 구명 운동을 중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게 있는 최선의 것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이 뜨거운 순교의 열정을 부디 꺾지 말아 주십시오. 오히려 제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저를 독려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결국 그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자기에게 있는 최선의 것, 곧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거룩한 죽음,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자기 삶을 아름답게 마감하였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깨끗하게 살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러운 죽음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라고 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며 여러 가지 절망과 죽음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확신하였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사도 바울처럼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