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가난과 하나님 나라

Google+ LinkedIn Katalk +

가난하고 핍박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삶의 유익은 많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다. 부자와는 달리 물질적인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고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세상적으로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상식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고 물질적인 부와 풍요를 멀리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과연 세상적인 가난이 심령의 가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일까? 또 물질적인 가난이 언제나 영적인 가난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가? 오히려 물질적인 가난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피폐하게 만들 위험이 있음을 우리는 일상에서 늘 경험한다. 일상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없을 만큼의 가난은 불편하다. 그런 가난이 지속될 때 보통 사람들은 영적인 자유를 경험하기보다는 열등감과 좌절감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는 절대적인 가난보다는 남과 비교한 상대적인 가난이 더 큰 문제가 된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나보다 더 부자인 사람은 반드시 존재하고 그렇게 비교하면 나는 언제나 가난하다는 생각을 면치 못한다. 부자가 더 잘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도 남과의 비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가난은 자존감을 떨어뜨릴 뿐만 아나라 세상의 불공평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이끈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존재하고, 강자와 약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강자는 약자를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는 불의가 횡행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힘의 불균형이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가난은 내가 능력이 없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강자의 힘의 논리 때문이고 사회적인 제도 탓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탄생하였다. 

19세기 유럽을 휩쓴 사회주의 사상은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이후 대다수 지식인은 사회주의가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고 믿었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사회주의는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현실 사회주의는 이상향이 아니라 자본주의보다 더 불평등하고 전체주의적인 사회라는 것이 판명된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 국가는 북한과 중국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여전히 사회주의 이념을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에게 아직도 사회주의는 매력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작동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주의 이념은 잘못된 인간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사회주의는 모든 욕망을 탐욕으로 규정하고,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는 평등을 추구한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똑같이 분배받는다면 누가 열심히 일할 것인가? 사회주의는 모두가 함께 못사는 하향 평준화를 결과할 뿐이다.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은 사회주의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가 무한경쟁과 물질 만능의 천민자본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이 제시한 소명으로서의 직업관과 청지기 정신으로 무장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