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 춘원이 친일로 돌아 섰을 때, 효자동 춘원의 집 대문앞에 서서 돗자리를 깔고 춘원이 죽었다고 대성통곡을 하던 벽초는 오늘 새로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지금 마음속으로 춘원을 위해 또 다시 통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벽초는 손수건을 꺼내 안경알을 닦아내며 이승에서 춘원과 무거운 작별을 이렇게 고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 춘원은 그의 한 많은 58년의 생을 이곳에서 조용히 마감하였다. 그는 아마도 숨을 거둘 때 그의 머리를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향 정주를 향했으리라.
결국 춘원은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1950년, 그해 10월 25일,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 세기를 풍미했던 글쟁이 천재 문학가는 이렇게 우리 곁을 쓸쓸히 떠나갔다.
그들은 춘원의 시신을 이곳 양덕고개 언덕바지에 가매장 했다가 1980년대 중반, 평양근교 즉설묘지에 안재홍, 정인보, 현상윤 등 납북 요인들과 함께 이장했다. 그러면서 그때 북한 당국은 이렇게 말했다.
춘원은 분명 친일은 했지만, 문학을 자신의 처세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그의 빛나는 문학적 성과와 위상을 인정해서 우리는 그를 평양의 남북요인 묘역에 모시는 것이라 했다.
춘원의 묘비에는 아무런 직함이 없다. 그저 ‘리광수 선생’이라는 이름만 적혀 있고 그 아래로 ‘1892년 3월 4일생, 1950년 10월 25일 서거’라고만 쓰여져 있다.
후일 미국의 친북 웹사이트 ‘민족통신’은 당시 이광수를 북으로 데리고 온, 리찬의 말을 인용, 춘원의 묘에 얽힌 사연을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당시 폐렴을 심하게 앓던 이광수를 위해 김일성 주석이 전쟁 중인데도 특별 열차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또 절친 홍명희를 보내, 춘원이 제대로 치료를 받도록 선처했지만 다 소용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평양 용성구역 용궁1동에 위치한 재북인사 칠성봉 묘역에는 납·월북 인사 65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 묘역에는 춘원 이광수를 비롯해, 국문학자 위당 정인보, 안재홍 전 민정 장관, 현상윤 고려대 초대총장, 무정부주의자 박렬, 김약수 초대국회 부의장, 송호성 전 국방경비대 사령관, 백상규 전 적십자 총재 등 6.25전쟁 때, 납·월북된 거물급 인사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춘원 이광수(1892~1950)처럼,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서 그만큼 많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은 달리 찾기 어렵다.
한국 문학사는 이광수를 빼고 기술될 수는 없다. 그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가 이토록 크고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풍금을 치고, 어린 막내 딸은 찬송가를 부르다
(춘원의 진심은 먼 훗날 역사가 심판한다고 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춘원은 운악산 봉선사에서 그의 6촌 운허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나의 친일 행위에 대한 진심은 먼 훗날 역사가 제대로 심판할 것이다”라고.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 나라 역사는 과연 그의 진심을 제대로 심판해 주고 있는 것일까.
춘원은 어떤 산보다 깊고 커서 그가 친일 변절해서 민족에게 준 상처는 너무나 컸다. 그래서 그 상처가 아무는데 100년이 걸려도 그 상처는 제대로 아물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춘원을 용서하려는데 사람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흐름으로 본다면 아마도 200년, 또는 300년이 되어도 사람들은 춘원을 진정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역사는 역시, 역사일 뿐이다. 역사는 국민의 화합이 만들어 가는 진실이며 국민 전체의 의견이지만….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