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난지도 삼동 소년시 ⑫
고아원건립 적극 지원한 미군들 45년만 상봉
신혼 단칸방까지 내주며 철없는 고아들 돌봐
광은형의 사랑 깨닫고 ‘삼동형제회’결성
‘단합하는 그룹’강조…남에게 주는 기쁨 전파
이 소년시에는 소년신문사가 있어 매일 신문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정형 2면에 다색판입니다. 1953년 3월 20일에 창간호를 발간하여 지금까지 매일 발행하고 있으며, 시청 앞 게시판에 첨부해서 공개하여, 그날 그날의 소식은 물론 문예란, 만화란도 있어 정서적인 시민위안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중략) 기자단 일행은 시찰, 관광, 기념촬영 등을 마치고 시의 특별 초대를 받아 오찬회(보리감자밥, 소금국 등)에 참석하였으며, 황광은 선생 부부의 헌신적인 봉사생활에 마음으로 깊은 경의를 아로새기며 귀로에 올랐습니다.
‘45년 만에 되새긴 전쟁고아 기억’
다음 글은 1998년 1월 8일자 중앙일보(미주판)에 이상영 기자가 쓴 기사이다.
“난지도 보이스 타운(6‧25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을 위해 황광은 목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고아원)의 이야기는 강산이 변해도 몇 차례 변했을 45년 전 옛 이야기입니다.”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황광은 목사(작고)의 부인이 시카고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한국전 참전 미 재향군인회 회원들 가운데 이 당시 고아원 건립에 적극 지원을 했던 미 제5 독립연대 소속의 월트 에드(중령 예편)와 조지 펨백(준위 예편) 두 미군 용사가 황 목사의 부인 김유선 씨를 찾아 45년 만에 6일 시카고에서 상봉이 이루어졌다.
칠십이 넘어 황혼기를 맞은 황 목사의 부인 김 씨는 그 당시 고아원을 도왔던 미 병사를 오늘 미국 땅에서 만나는 의미를 “적군에 포위돼 대부분의 전우를 잃은 와중에도 인도적 차원에서 한국 고아들을 동정하며 고아원 건립에 막대한 도움을 기울인 병사들 가운데 아직도 그 당시를 잊지 않고 저를 찾아준 이들에게 너무 감사하며 기꺼이 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김유선 씨는 당시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황 목사와 결혼해 신혼을 꼬박 고아들을 위해 보냈다는 것이다.
황 목사 부부는 전쟁으로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위해 먹이고 입히고 교육까지 담당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 교계를 비롯한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에드 씨는 당시 고아원 사진과 신문 기사를 공개하면서 과거를 회고했다.
70~80 고령의 노장들과 황 목사 부인의 만남은 한국전 당시의 상황을 새롭게 상기하는 분위기였다.
날개 찢긴 들오리 한 마리
1953년 7월 27일, 3년 동안 끌던 한국전쟁은 일단 휴전되었으나, 난지도 삼동 소년시의 소년들은 돌아갈 집이 없었다. 황광은 원장의 지도 아래 자기들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아련한 희망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삼동 소년시 악단
“특히 우리 소년시의 플롯으로만 구성된 악단은 굉장한 인기였습니다. YMCA에서의 공연을 필두로 전방 위문 공연을 가져 갈채를 받았으니깐요. 모두들 대단히 열심이었고 씩씩하게 자랐습니다. 큰형님을 부모님같이 받들고 믿는 동안 소년시에 들어오기 전의 깡패나 구걸로 거칠어진 성품들이 차츰 가라앉아 갔지요.”
삼동 소년시 제3대 시장을 지낸 김용호 씨의 말이다.
황광은 형은 소년시의 주름진 소년들의 마음을 펴 주기 위해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사회의 명사들을 데려다가 도움이 되는 말씀을 들려 주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 설교가 되기도 했고 훈화가 되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분으로는 현동완(이하 경칭 생략), 김창인, 이보라, 이연호, 이일선, 최영일 제씨라고 했다.
“큰형님은 자기가 보아 주던 사람은 끝까지 보아 주고야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저희 삼동 소년시 출신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었지요.”
황광은 형이 난지도에서 나가 새문안교회 교육목사로 어려운 살림을 할 때 김용호를 비롯한 몇 명은 눈치코치없이 단칸방 사택에 가서 자기네를 먹여 살리라고 죽치고 앉아 있었다.
광은 형은 그러한 그들을 마다않고 죽으로 연명하면서도 돌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있던 신인복은 세브란스 병원에, 박만복은 대한기독교육협회에, 김종구는 정비 공장에, 한종걸은 기독신보사에 각각 취직을 알선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나쁜 것들이었어요. 손버릇을 못 고치고 형님네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 내오는 녀석이 없나, 그러지 않아도 가난한 형님에게 가서 돈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놈이 없나…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나쁜 놈은 바로 나입니다.”
김용호 씨의 말이다. 그는 일찍부터 담배를 배웠다고 한다. 물론 형님 몰래 피우던 담배였으나 형님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광은 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피울 때마다 물음표(?) 하나씩 마음에 치고 피우도록 해라.”
그 말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고 했다. 광은 형이 아주 가시고 난 뒤에야 그 참 사랑을 정말 뼈저리게 알 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삼동 형제회’를 결성했는데 거기에는 장형들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나다순)
김광영, 김영묵, 김용찬, 김용호, 김유근, 김종구, 김종태, 김태웅, 김형봉, 박성구, 송정길, 심종택, 엄기섭, 오관수, 오복규, 오성기, 원완식, 유시돈, 이수연, 이우기, 이인길, 이풍호, 전기범, 최봉균, 한동창, 한상만, 한상철, 한세동.
모임의 회장은 장형인 김형봉이다.
“제 나이요? 저희들에게 정확한 나이가 생일이 있나요. 고아원에 들어간 날이 제 생일이 되는 것입니다. 나이는 어림짐작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 생일은 10월 13일입니다. 그날 저는 고아원에 들어갔으니까요.”
이런 소년들을 모아 놓고 광은 형은 귀에 못이 박히게 “너희끼리 단합하는 그룹이 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기가 지니고 있던 것을 남에게 주는 기쁨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제가 시장 취임을 하니까 시계를 주더란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 즈음에 방구호란 친구에게 당신이 쓰던 만년필을 선뜻 내주며 ‘네가 써라’고 하더군요.”
결국 광은 형의 그런 섬세한 배려로 해서 이른바 ‘100인 위원회’ 위원들을 찾아다니며 학비를 얻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100인 위원회 위원 가운데는 이상만, 이혜경, 이경재, 이종환 제씨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돕는 돈으로 공부를 하면서 YMCA에서 일하게 되었고 거기서 원치호 현총무는 물론이고 김태묵, 김천배, 강문규, 여러분의 도움으로 차차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 김용호 씨의 고백이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