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24, 야고보서 2:1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의 내면보다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에 내면은 보이지 않고 외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라고 한다.
실로암안과병원이 처음 개원하였을 때 매년 여름이면 허름한 옷차림새로 병원을 찾아와 말없이 헌금봉투를 두고 가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있었다. 고무신을 신고 허름한 옷차림에 넥타이도 매지 않고 오기 때문에 직원들은 오면 오는가 보다, 가면 가는가 보다 하고 특별한 신경도 쓰지 않고 대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어르신이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직원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왜 목사님을 만나기 원하느냐고 물으니 기도를 받고 싶다고 하였다. 밖에서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나가서 그분이 내 방에 들어오시도록 하였다. 내 사무실에 어르신을 모시고 간절히 손을 잡고 기도해 드렸다. 그분은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니 참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내가 어르신에게 누구시냐고 물으니, 어르신은 자신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매년 현금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은 목사님의 기도를 꼭 받고 싶었다고 하며, 모 교회의 장로이며 모 학교의 교장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장로님!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였다. “제가 잘 모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
그해 겨울 M학교에 가서 설교를 하였는데, 학교에 가서 그분을 만났다. 그분이 안내해 주어 함께 차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장로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장로님을 가리켜 ‘사랑의 성자’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이런 경우를 볼 때 야고보 사도가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한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성경 말씀을 떠나 외모를 보고 너무 쉽게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변두리에 있는 모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섬긴 적이 있다. 그때 그 교회에 노점을 하는 집사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허리가 굽는 척추장애가 있었지만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부지런히 노력하며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성도들 대부분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십일조와 헌금을 나름대로 잘했지만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나는 그가 성실한 장로감이라고 생각했으나 사람들은 외모로 그를 판단하는 것 같았다.
야고보 사도는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행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2-5)”라고 하였다.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된 것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뿐만 아니라 그의 낙타에게도 물을 먹이는 너그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사람의 외모보다는 내면의 믿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처절하고 약하고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고 선대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하늘의 영원한 축복과 땅의 형통의 축복으로 채워 주신다.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 7:24)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겉모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보는 것이고, 내면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면으로 볼 때 인간적인 눈에 약하고 힘없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 가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