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아내가 백화점 지하식품점으로 찬거리를 사러 나가겠다는데 오래간만에 막내딸 손녀가 와서 심심해하던 차니 군말없이 선뜻 같이 나섰다. 네 살바기 조그마한 외손녀를 두고 창호와 아내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어린 나이에 말도 잘하고 그림까지도 곧잘 그려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지 하버지는 왜 머리가 없어?”
창호는 힐끗 손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지금껏 수없이 묻던 말을 또 꺼냈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이 다 도망가 버렸어.”
“왜 갔어?”
“나도 몰라.”
창호는 차를 세웠다. 백화점 지하 음식부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니까 사주고 있으세요. 얼른 찬거리를 사가지고 올테니까요. 여기 꼭 계세요 다른데 가시지 말고요.”
창호는 유리통 속에 들어있는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코코아, 바닐라, 딸기. 어느 것을 사주어야 할지 몰랐다.
“너 어느 것 먹을래?”
손녀는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거!’ 하고 손으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손녀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흐뭇한 웃음이 가득찬 모습에 한입 두입 맛있게 넘어갔다.
“하버지도 줄까?”
“응? 할아버지 먹으라구?”
창호는 손녀 손에 쥐어있는 아이스크림을 크게 입을 벌려 물었다. 위로 솟아있는 아이스크림이 없어야만 손이나 옷에 흘러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창호가 아이스크림을 한입 무는 순간 손녀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고만 것이다. 마치 먹을 게 바닥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알게 된 것처럼 당황하는 손녀의 얼굴이 창호 눈에 비친 것이다. 그러나 입 속으로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이미 녹아 버렸는 걸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창호는 급하게 꿀꺽 삼키고는 말을 했다.
“녹아서 옷에 떨어질까봐 할아버지가 크게 먹은 거야.”
“그렇게 많이 먹으면 어떡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입술이 비죽거리는 게 아무래도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더 사줄게 할아버지가 더 사준다니까!”
창호는 다급했다. 큰소리로 울어 제친다면 틀림없이 많은 사람이 어린애의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먹어서 저렇게 우는 것이라고 할 것이고 혹 사위나 사돈댁에서라도 알면 그게 무슨 망신이냐 싶어서였다. 창호는 온갖 아양을 다 떨어가면서 울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아내가 왔다.
“영난아! 할아버지께 아이스크림 드렸어?”
“응.”
“그런데 왜 심술을 부려?”
“많이 먹으니까.”
“먹으니까가 뭐야 잡수시니까 그래야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네 옷에 떨어질까봐 그러신 거야.”
“옷에 떨어졌는데.”
창호는 그제서야 눈웃음을 지으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애에게 설명을 했댔자 뭘해?”
“그럴 줄 알면서 왜 화를 내세요?”
“내가? 내가 쩔쩔 매고 있었는데 화를 내?”
창호는 어물쩍 넘기고 말았다. 아내는 웃었다. 창호도 웃었다. 그러자 덩달아 손녀도 깔깔대고 웃었다.
원익환 장로
<남가좌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