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고르디우스 매듭’(Gordian Knot)이 있다. 매우 복잡하여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머리 아픈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트루키에(Turkiye)의 영토에 있던 프리기아(Phrygia)의 수도 고르디움에 고르디우스의 전차(戰車)가 있었다. 전차에는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매듭이 달려 있었다.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이 매듭을 풀 수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마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대왕이 그 지역을 지나가던 중에 그 얘기를 듣고 칼을 뽑아 매듭을 잘라 버렸다. 여기서 유래된 것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신학에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다. 신학 또는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주권 교리와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가끔 있다. 인간의 책임을 너무 강조하면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축소된다. 현대에 출간되고 있는 기독교 서적들의 90% 이상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의 자유 의지,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유 의지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막으신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 일을 못하게 되면 정죄(定罪)할 수 있는가? 인간이 죄를 짓도록 작정되었다면 그 죄에 대해서 인간에게 책임을 짓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나님께서 택한 자가 아닌데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믿지 않았다면 그에게 정죄하고 벌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 범죄를 능력으로 막으셨다면 아담은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로봇(Robot)으로 전락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왜 사탄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지 않으셨을까? 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지 않으실까? 이런 의문들이 생겨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람은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가지도록 창조하셨다. 때문에 존귀한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지혜와 복된 목적에 더 기여한 것으로 본다. 죄가 더한 곳에는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시되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유익이 되는 경우에만 허용하신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셨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진정한 도덕적 자유는 죄의 속박(束縛)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나님은 항상 의로우시다. 완전한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 전지전능하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다.
“곧 창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내 어머니의 태(胎)로부터 나를 택정하사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5) 누가 택정 받았는지는 전도해 보면 알 수 있다.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한 택하심이다.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 목사는 “누군가 구원에서 멀어지면 자신의 책임이지만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지식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통합된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에 감동되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계시하셨다. 죄가 오류를 일으킨다. 거룩한 사람들 속에서 죄를 억제하신다. 육신의 생각의 활동을 막으신다. 그렇다고 이들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유를 주신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