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보이스 타운 < 3> 크리스챤 신문 및 대광학교 ⑦
교회·기독교 학교 소년단 창설
황 원장, 아들 기념 위해 땅 기증
미완성 집 팔고 다행이라 여김
생활철학 ‘삼무(三無)주의’ 표현
소년단을 향한 정열이 있었기에 그는 정열적으로 일했다. 그 결과 간사장으로 일하면서 중구 회현동에 대한소년단 회관을 확보했고, 제2회 한국 잼보리대회를 경희대학교에서 개최해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각 교회 지도자들의 참여를 얻어 여러 교회와 기독교 학교 안에 소년단을 창설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송추에 야영장 후보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송추의 땅은 한국보육원 원장 황온순 여사가 자기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기증한 땅이다. 그녀는 하나밖에 없던 외아들을 6.25에 잃었는데, 황 목사가 제주도 한국보육원에서 일할 때 아들처럼 끔찍이 사랑했었다. 그래서 황 목사가 일하는 소년단을 위해 캠프장으로 적합한 그 대지 5만 평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한국보이스카우트 60년사 편찬위원인 영암교회 손관식 장로가 이 사실을 한국보이스카우트 60년사에 기록을 남기는 수고를 했음을 밝혀둔다.)
황 목사는 소년단 일을 하면서 재미있어 했고, 그러니 자연 그 일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직원들과 소년단원들 가운데서 선발해 국제대회에 파송하기도 했고, 그 자신이 미국에서 간사장 훈련학교를 마치고 온 뒤에는 소년단 운동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직책이 목사로서 오래 할 일은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지방에 출장을 내려가면 도지사의 초대를 받기가 일쑤였고, 또한 으레 술 좌석이 마련되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간사장인 정달빈 목사를 간사장으로 앉히고, 자기 자신은 고문이나 아니면 그런 한직을 맡고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바탕 일이 터지게 된 것이다. 그 무렵 황 목사네 가족은 대광학교 사택에서 이사나와 안암동 로터리에 있는 개천가 전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번 셋방을 찾아 옮겨 다니는 데 고충을 느낀 김유선 여사는 자기들의 집을 하나 장만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있는데, 때마침 광주 사람인 황 목사 친구가 함께 집을 짓자고 제의해 왔다.
그 친구의 이야기인즉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에다 집을 한 채 장만해 두고 싶다는 것이었고, 또 집을 나란히 두 채를 짓고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당시는 대지만 있으면 건축비는 은행에서 융자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 돈 약간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가 있었다.
그 친구는 휘경동 외국어대학 앞에 80평 대지 두 개를 구입했으니 하나씩 나눠 가지고 집을 짓자고 했다. 김유선 여사는 은행융자를 얻어서 함께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축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침내 사건이 터진 것이다.
1월에 있을 소년단 총회를 앞두고 연말 회계 감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당시 회계를 맡고 있던 젊은 직원의 실책으로 감사가 끝나지 않았다. 총회는 다가오고 해서 할 수 없이 간사장인 황 목사가 부족 액수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하고 가까스로 감사를 통과시킨 뒤 총회를 치렀다.
그런데 그 부족 액수에 대한 대책 방안을 미처 찾기도 전에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그와 아울러 대한소년단의 이사진과 실무진은 거의 바뀌게 되었다. 그러니 그 돈은 결국 황 목사 한 개인의 사채가 되어 버렸고, 뿐만 아니라 그 액수를 가까운 시일 내에 변상해 놓아야만 되게끔 형편이 바뀌고 말았다.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생애에 처음으로 마련하게 될 번한, 아직 미완성인 집을 파는 길이었다. 김 여사로서는 그 집을 팔고 싶을 리 없었다. 그러나 황 목사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아쉽지만 그 집을 처분하기로 제안했다.
서둘러서 집을 팔게 되었다. 다행히 짓는 동안에 권리금이 붙어서 땅값을 친구에게 돌려 주고도 대한소년단의 빚을 모조리 갚을 수 있었다. 물론 손에 남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빚을 갚고 난 어느 날이었다. “여보, 인제는 발을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소” 하고 황 목사는 김 여사에게 말했다.
“빚이 없으니 정말 시원하지요?” 하고 김 여사가 말했더니 황 목사의 대답은 뚱딴지 같았다.
“그런 뜻이 아니오. 글쎄 ‘황광은’이가 집이 있다고 생각해 보우.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요? 언제는 어려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살겠다는 사람이 내 집을 소유하고 산다는 것은 애당초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소.”
김 여사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오. 안됐소” 라고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마치 약을 올리려는 것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하기는 집을 지을 때에도 계속 못 마땅하게 생각해 오던 황 목사이기는 했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곧잘 오갔었다.
“여보, 집 다 되면 아이들 데리고 당신만 들어가서 살아요. 난 따로 나가서 살 테니까. 목사가 내 집을 가지면 마지막이오.”
“별 소릴 다 듣겠네.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이렇게 옥신각신하기는 했었지만 그때는 또 그때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집을 팔아 버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쓰라린데, 마치 고소하다는 듯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래서 김 여사는 톡 쏘아 붙였다.
“여보, 당신은 가정 없이 혼자 살았어야 할 사람이었어요. 정말 너무해요. 나는 당신에게서 미안하다는 말 같은 것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어쩌면 나의 서운한 마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하고 그런 말만 하우?”
황 목사가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마음에서 한 소리라는 것을 김 여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하도 화가 나서 막 쏘아 붙인 것이다. 황 목사는 그제서야 미안함을 느꼈던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광은 목사는 확고한 생활 철학이 있었다. 황 목사는 그것을 ‘삼무(三無)주의’란 말로 표현했다. 쉽게 말해서 ‘세 가지 없이 살기’이다. 즉, 첫째로 명함 없기, 둘째로 도장 없기, 셋째로 집 없기이다. 달리 말해서 명예에 초연하겠다는 것, 돈에 관해서 무관심하겠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나그네와 같이 살겠다는 것 등이다. 그는 철저하게 ‘삼무주의’를 실행하다가 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광은 목사의 가정에는 항상 기쁨과 평화가 있었다. 그것은 욕심이 없는 청빈에서 오는 기쁨이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였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