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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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하기 시작하던 어린 시절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은 부자 하나님이셨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기어들어가고 기어나오던 초가삼간이었다. 우리집 돌 담벼락 하나를 두고 옆집에 큰 집 하나가 들어서고 있었다. 새참 시간 어린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 목수 아저씨에게 묻더란다. “아저씨, 아저씨.” 이 큰 집에 누가 살아요?” 짓궂은 목수 아저씨가 “하나님이 사신단다”라고 대답을 했다. 어린 영모는 날 듯 뛰어 엄마에게 달려와 “엄마, 엄마, 하나님이란 분 대따 부자인가봐” 그 부자 하나님은 아버지가 없는 나의 아버지가 되셨고, 그 하나님의 집은 내가 뛰어놀고 예배하는 우리집이 되었다. 가난하게 살던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은 부자 아버지셨다. 그 이후 평생 내 마음은 부요롭기만 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서 참 좋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없었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사는 게 너무 좋았다. 

 1990년 말 나는 개척교회를 설립하리라 선언하고 섬기던 교회를 떠났다. 내 손에는 퇴직금으로 받아서 가정예배 시 하나님께 이미 봉헌한 450만 원이 전부였다. 주일 한 시간만 예배를 드릴 터이니 누군가 신앙인이라면 유치원이든 공장이든 학원이든 빌려주겠지, 하고 너무나 쉽게 생각했는데 세상의 바람은 참 차가웠다. 「하나님, 빈들에 성경 올려놓고 설교할 보면대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예배드릴 공간 한 켠만 주세요.」 금식기도를 시작한 지 며칠이 못 되어 최덕식 장로님을 만나 은평구 신사동 유치원 한자락 빌려 기도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교회가 맨손 맨몸 맨땅, 소위 3맨 교회 한소망교회이다. 

 기도회는 은평구 신사동 유치원에서 시작했지만 일산 신도시로 들어가 목회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기도회가 반년이나 지난 어느 날 일산 신도시 예배당 공간은 꿈을 꿀 수도 없었고, 일산 외곽 당시 농촌마을 능곡 지하 40평 조그만 공간을 계약하게 되었다. 건물주는 어느 교회 집사님이셨는데 그 분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 잠시 멈추고 나를 가만히 쳐다 보셨다. “목사님, 계약금은 물론 중도금, 잔금 잘 준비되셨지요?” 하필 이 순간 나의 약점을 찌를게 뭐람. 당황한 나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자랑했다. 

“예, 사장님, 저는 돈 걱정을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아이쿠 예 예 예, 부자집 아드님이셨군요. 부자집 아드님이 사업은 안하시고 목사님이 되셨군요?”

 어릴 때 내가 만난 부자 하나님은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부요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항상 왜 이토록 든든하기만 했을까? 세상 어디에 가셔도 누군가에게 돈 한 푼 꿀 곳도 없는데 나는 왜 늘 당당하기만 했을까? 평생 우리집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친구들이 모여 밥을 먹으면 먼저 달려가 밥값 계산을 하며 살았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서 저는 참 좋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부자라서 참 좋습니다. 그 부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평생을 함께 해주시니 참 좋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는 제게 평생 대따 부자이셨습니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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