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다. 내가 이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아마도 장신대 학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후 창조적 파괴라는 말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다. 경제학에서부터 인문사회학, 기술공학 하물며 심리학, 교육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런데 왜 종교 아니 교회에 대해서는 이 말을 사용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누군가는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바로 교회와 우리 기독교의 존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처음부터 그의 삶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파격이었다. 당시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성전주의자들에 대해 비판과 저항으로 일관하신 것을 보면 그는 창조적 파괴만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음을 아셨던 선각자셨다. 율법을 대신해 사랑의 법을 말씀하셨고, 예루살렘 성전주의자들의 기득권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과감하게 파괴하신 것은 새로운 시대와 세상을 만드시기 위한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 사건은 창조적 파괴를 향한 예수의 최후 선택이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만이 가능했기에 스스로 고난과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는 창조적 파괴의 방법을 결단하셨던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고, 고난과 박해와 순교의 결단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그는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절대 진리를 깨닫고 선포한 위대한 창조적 파괴자였다. 마틴 루터는 중세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창조적 파괴로 종교개혁을 이룬 개혁자다. 교황과 인간의 탐욕을 위해 성서의 가르침을 왜곡하려 했던 그 시대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하고 개혁한 창조적 파괴자였다.
지금 우리는 다시 창조적 파괴의 현실 앞에 서 있다. 무엇을 파괴할 것인가. 무엇을 다시 세워야 하기에 우리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창조적 파괴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먼저는 세속의 헛되고 잘못된 정치 논리와 이념에 종노릇하게 한 원천이 교회에 있었으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 이제 창조적 파괴를 위해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 깨어 있는 성도들이 일어나 창조적 파괴의 길을 가야 한다. 고난의 길일지언정 예수와 바울과 루터가 갔던 그 길로 들어서야 한다. 다시 세워야 할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상상하며 당장 힘들더라도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