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본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왕따로 시작했다는 거. 다들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란 말도 실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안디옥의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 맨날 모여서 ‘그리스도, 그리스도’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붙여준 이름입니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예수쟁이’일 겁니다. 이건 명예로운 호칭이 아닙니다. 조롱의 호칭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대우 받는다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도리어 더욱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이 그리스도에 고개를 숙이게 된 겁니다.
세상이 뭐라 한다고 따라가지 맙시다. 세상 풍조는 바로 그런 겁니다. ‘거룩’이란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분되었다는 뜻입니다. 구분, 눈에 띕니다. 결코 그 주위와 같지 않습니다. 눈에 띈다고 겁먹지 말고 보석 같은, 순결한 믿음으로 당당하게 사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되면 어떨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부터인지 여론에 아주 민감해졌습니다. 여론이 교회에 대해 부정적이다 싶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입니다. 여론에, 사회에 잘 보이려고 주님께 드려야 할 영광과 헌신을 다 갖다 바칠 정도입니다. 세상이 뭐라 한다고 아예 절절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정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티 나면 안 된다고, 잘 지내야 한다고, 그들 눈 밖에 나면 안 된다고 아주 민감하게 삽니다.
그 결과가 뭘까요? 사회가, 세상이 교회를 이해하고 감싸주고 사랑해 주던가요?
어떤 사람이 생선 가게를 내고 간판을 달았습니다. “이곳에서 신선한 생선을 팝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다 들어와서 말합니다. “간판에서 ‘신선한’은 빼세요. 다 신선한 생선 아닌가요?” 말을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선한’이란 단어를 뺐습니다.
조금 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그럽니다. “간판에서 ‘이곳에서’는 빼도 되지 않을까요? 이곳인지 다 알지 않습니까?” 그 말도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글자도 뺐습니다. 조금 뒤 다른 사람이 들어오더니 말합니다. “‘팝니다’라는 말은 빼야지요. 거저 주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글자도 빼버렸습니다.
한참 뒤 또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그럽니다. “‘생선’이라는 글자, 필요할까요? 근처에 오기만 해도 생선 냄새가 나거든요.” 그래서 ‘생선’이란 글자도 빼버렸습니다. 이제 그 가게는 간판 없는 생선 가게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거기서 뭘 파는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이야기라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자기 소신도 없이, 자기만의 색깔도 없이 세평(世評)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은커녕 남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아예 모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소신껏 삽시다.
양의섭 목사
<왕십리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