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강요에도 굴하지 않은 의로운 삶
부흥회서 성령 은사 받고 목사 될 것 결심
주기철(朱基徹)이 태어나던 때는 한국 민족 역사에서 가장 처절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영구히 식민화하려고 명성황후를 그 침전에서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불안에 떨던 고종 황제는 러시아 대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1년여를 외국 공관에서 도피 생활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기독교 박해의 역사는 한국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같은 발자취를 남겼다. 일제 36년간 박해가 수없이 많았으나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 독립운동,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박해가 대표적이다. 일제가 우리나라에 처음 신사를 들여온 것이 1918년이었다. 그 후 1925년 남산에 신사를 세우고 처음에는 참배를 자유에 맡겼으나 1930년대 만주 침략을 계기로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2년 장로교 제21회 총회에서 교회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참여 거부에 대하여 결의하고 당국에 교섭했으나 거절당했다. 1938년 신사참배 불참을 결정한 장로교 계통학교 18개교가 문을 닫았고, 평양신학교도 폐교했다.
하나님은 의인 몇 사람으로 많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일제 말 신사참배 강요로 혈안이 된 일본 경찰들 앞에서 끝까지 의롭게 산 사람 중에 주기철 목사가 첫 자리에 있다 하겠다.
주기철은 1897년 11월 21일 경남 창원군 웅천읍(熊川邑)에서 주현성(朱絃聲) 장로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유년 때 교회에 다닌 주기철 목사는 누구보다 교회를 섬기면서 사랑했다. 그러던 1912년 주기철 목사가 다니던 학교에서 춘원 이광수를 알게 되었으며, 이광수는 후에 친일파로 분류되지만 이때까지는 나라를 위해서 노력하던 자로, 그가 방문해서 오산학교 학생 모집에 대해 설명했다. 주기철은 이 강연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하여 그 지역 개통 소학교를 마치고 1913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1916년 졸업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장로가 세운 학교로, 당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적 기상이 강했다. 주기철은 오산에서 훌륭한 선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배우고 항일사상을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곧은 절개를 지니게 한 신앙적,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산학교를 마치고 남강의 민족산업을 통한 구국정신에 영향받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일 년 남짓 공부한 후 평소에 앓던 안질이 나빠져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 웅천에 내려가 고향 교회의 집사로 봉사했다.
주기철은 낙향하여 지병을 치료하면서 고향 교회에서 봉사하는 한편 교남학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그 지방의 청년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일에 힘썼다. 20세가 되던 1918년 김해 재산가의 딸 안갑수(安甲守)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으나 후에 삼남과 딸을 잃어 아들 넷만 남았다.
이 무렵 한국교회의 위대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주기철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중생을 체험한 후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1922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재학 시절 의미 있는 일을 한 가지 했다. 그것은 당시 신학교에 미국의 남·북,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가 각각 기숙사를 한 동씩 지어 자기들 선교 구역 학생들이 생활하도록 했다. 따라서 학생들이 지방별로 나뉘어 생활했다. 주기철은 이것이 신학교부터 지방색을 부추기는 원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학교 당국에 건의하여 학생들이 고루 섞여 생활하도록 조치하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교회의 고질인 지방색 철폐에 노력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