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을 시작한 지 햇수로 벌써 3 년이 다 되어간다. 작년 봄에는 꽃모종을 뜰 주변에 많이 심었는데 올해 다시 움이 트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 매년 다시 심어야 할 모양이다. 아직도 서툴기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처음 서툰 손으로 심은 꽃이 비교적 잘 자라는 것이 신기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올해는 집주변 산기슭에 무성한 잡초를 뽑아내고 빈터에 꽃나무를 심어보기로 하고, 양평산림조합에서 4월에 한시적으로 여는 나무 시장을 찾아서 철쭉, 개나리, 미스김라일락, 그리고 명자나무 여러 그루를 들여왔다.
꽃나무 묘목을 이곳저곳에 다 심고 나니 힘은 들었지만, 곧 예쁜 꽃들이 산자락을 덮을 것으로 생각하니 기쁜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 개나리 심은 자리가 아직도 듬성듬성한 것이 아닌가. 개나리 묘목을 더 사 올까 하다가 문득 개나리는 가지를 꺾어서 꽂아놓아도 잘 산다는 말이 생각났다. 심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여러 군데 꽂으니 땅속 깊숙이 들어가 제법 잘 자리를 잡을 것 같은 예감에 마음이 흡족하다. 마침 봄 햇살이 가득한데 기온도 높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듬뿍 물을 주어 촉촉한 흙에서 나무들이 물과 영양분을 마음껏 빨아들이는 상상을 하니 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다만 매일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고 하니 자주 오지는 못하는 형편이라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어쩌랴. 심고 물 주는 것은 우리 몫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니 괜한 걱정은 금물일 듯하다.
일손을 다 마치고 편안히 앉아 쉬면서 삽목한 개나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저 따뜻한 햇볕과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만 있으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는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예쁜 노란색 꽃이 활짝 피어난다고 상상해 보라. 이것이야말로 마술과 같은 기적이요, 경이요, 신비가 아닌가.
사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건 하나도 신기한 일이 아니다. 꽃나무가 어떻게 자라서 꽃을 피우게 되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과학은 세상의 신비를 다 파헤쳐서 내쫓아 버렸고, 아직 모르는 게 있다면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대과학의 시대를 예견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미지의 세상을 정복할 날이 올 것을 선언한 셈이다. 과연 요즘 인공지능과 컴퓨터의 눈부신 발전을 보고 있으면 인간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것 같다.
그뿐인가? 과학의 눈으로 무장하고 소유욕으로 가득한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꽃나무조차도 소유하고 지배하고 정복할 대상일 뿐 나무 한 그루가 간직하고 있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근대과학과 물질문명이 시작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구의 자원과 산림과 동식물과 환경을 남용한 결과는 기후위기,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동식물의 대멸종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과학은 지식의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가고 있지만, 실상 미지의 세계는 그 이상의 빠른 속도로 더 커져만 간다. 이 세계는 알면 알수록 더 신비하다. 뉴턴은 자신이 마치 대양의 바닷가 모래밭에서 예쁜 조개를 주워들고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대자연의 신비 앞에 더욱 겸허해진다고 말한다.
길가의 한낱 돌멩이나 들꽃 한 송이라도 그 의미와 가치는 단지 인간에게 유용한 정도에 의해 평가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무언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 같다. 유대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의 사물은 벽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향하는 문이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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