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은 숙명적으로 타고난 충성스런 군인이었다. 나이 30세에 장군이 되고, 33세에 이 나라 최초 육군 대장에 오른 입지적 인물이다.
그는 지난 날 이 땅에서 벌어진 6.25전쟁 ‘다부동 전투’에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하는 장군 돌격 명령으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어렵사리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다. 그리고 그는 사형(死刑) 직전의 박정희(朴正熙) 소령을 극적으로 살려준 사람이다. 그로 인해, 후일 박정희 소령은 강력한 대통령이 되어, 이 나라 근대화 산업 발전에 크게 공헌하므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누구의 은공인가? 어찌 이뿐이겠나? 전쟁 중에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씩 하면서 휴전협정 직전,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담판으로 우리 안보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최초로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사람도 바로 백선엽 장군이었다.
또 전쟁 중 재임기간, 미군의 물자 및 장비 지원을 어렵게 설득, 이끌어 내, 10만의 국군을 20만으로 증편하는 등 새로운 2군단을 창설, 우리 국군 전력을 가장 높은 곳으로 증강시킨 그 토대 위에 오늘의 세계 6대 군사 강국이 된 것을 아무도 부인 못한다. 지난 6.25 한국전쟁 때 춘천 북방 ‘금성 돌출부 전투’에서 최초로, 우리 국군 단독 작전으로 한반도 전선에서 진을 치고, 끈질긴 공세를 멈추지 않던 중공군 30만 대군을 전선에서 처음 물리쳐, 고구려 이후 한반도 군대가 대륙 군대와 싸워 이긴 사람도 백선엽 장군이었다.
또 미국의 ROTC 제도를 우리 나라에 처음 도입해서 군 초급장교 수급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사람도 백선엽 장군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 155마일 철책선 최전선을 지키는 소대장 73%가 ROTC 출신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며, 이 또한 먼 장래를 내다 본 당시의 백 장군의 혜안(慧眼)에 우리 모두는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군에서 백선엽 장군과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전 경희대 교수, 김점곤 장군은 ‘인간 백선엽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백 장군은 청소년 시절을 빈곤과 고난 속에서 성장했다. 그 속에서 제2의 천성이 된 성실, 소박, 근면, 정직, 검소한 인품과 생활 태도, 그리고 애국심 등을 지켜 보면서 나는 평생 그를 존경하게 됐다”라며, 이어 “그는 항상 지나치리만치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그러나 친구와 부하에게는 군인답지 않으리만치 관대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선의 노력, 그 대가로서의 성과를 늘 신봉하고 있었다. 그의 성공에는 비결이 따로 없었다. 다만 천부의 총명과 예지를 갖추고 겸양과 정직, 성실로 일관한 결과가 바로 그가 6.25 전쟁에서 이룬 위업의 바탕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 장군이 예편 후, 그와 가장 많이 인터뷰하고 함께 회고록 등 6.25 전쟁 ‘징비록’을 출간한, 전 중앙일보 유광종 작가는 그의 저서 ‘백선엽을 말한다’에서 또 이렇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는 70여 년 전 벌어진 한반도의 격렬한 전장(戰場)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적을 물리치고 수많은 승리를 이뤄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싸움꾼, 명장(名將), 그리고 탁월한 승부사(勝負士)였습니다”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한다. “3년 1개월 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우리 국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과를 기록한 이가 바로 백선엽 장군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전쟁을 함께 수행했던 미군(美軍)이 모두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국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군 지휘관’이라는 명예를 안긴 쪽도 바로 미군(美軍)이었습니다.”
정말 백선엽 장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실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국가에 충성하는 나라 사랑 애국정신(愛國精神)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백 장군을 기리며 그가 남기고 간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고 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항상 전쟁에 대비하라”고 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예방하고 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6.25의 지난날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지금 진행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스스로 지킬 힘이 없거나 함께 싸워줄 동맹이 없으면 침공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좋은 귀감이라 하겠다.
지난 6.25 전쟁은 비록 휴전은 되었지만, 공산군의 침략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세계인의 자유를 지킨 연합군이 승리한 전쟁(Victorious)임은 틀림없다. 이 귀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때 전쟁터에서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만 하더라도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했다. 미8군 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도 이때 전사했다. 이 한국전쟁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만 4천여 명,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정전 이후 70년이 흐르면서 6.25 전쟁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전후 세대는 아예 관심도 없다. 다음 세대가 6.25 전쟁을 모르면 이제는 정말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되고 만다. 미국 워싱턴 D.C에 세워진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는 ‘Freedom is not free’란 말이 새겨져 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곧 6.25 전쟁 74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대 백선엽 장군이 우리에게 던지는 이 귀중한 메시지를 오늘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서, 우리는 6.25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세계에 내세울, 우리의 영웅이 필요할 때다. 우리 모두 함께 이런 일에 노력해야 한다.
채학철 장로
<전농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