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유대교의 정수(精髓)는 민족적인 자존심, 우월성에 대한 신념, 자신들이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자신들은 선민(選民)이며 언젠가는 인류의 지배자가 되고 입법자가 된다는 운명을 확신하는 태도이다.
1925년 미국 내의 유대인들은 45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유대인 공동체가 되었다.
1930년대 독일은 유럽에서 경제, 군사적, 문화적으로 강력한 국가였다. 고도로 문명화된 국가에서 유대인들에게 엄청나고 분별없고 야만적인 행위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1933년까지 독일은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는데 이 중 1/3은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인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Judensau)와 사이비 민족 이론에서 끌어 들였다는 주장이 있다. 히틀러는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대학생들은 일종의 전위대(前衛隊)였다. 언론은 실제적이며 생생한 폭력적 보도들을 통해 자랑스러운 유대인 공격에 힘을 실어 주었다.
1930년 미국의 대공황(大恐慌)은 나치에게 오히려 권력을 손에 쥐는데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바이마르(Weimar) 공화정(1919~1933)이 교체되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다. 히틀러가 12년 간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 유대인들을 향한 잔혹 행위와 학살극이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드디어 유대인 대학살(The Holocaust)이 계획되었다. 괴벨스(Goebbels,1890~1945)의 민중 선동, 친위대 우두머리 힘러(Himmler), 냉철하고 무자비한 토르케마다(Torquemada, 스페인 종교 재판소 초대 장관) 등이 폭력과 불법과 테러를 주도하였다. 얼마 후에 다카우(Dachau)에 최초의 집단 수용소가 생겼다. 1938년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독일을 떠났다. 나치 당원과 돌격대에 의해 1천300개의 유대인 회당(會堂)에 불을 질렀다. 7천 개 이상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을 당했다. 역사는 이를 ‘수정(水晶)의 밤’(1938.11.9~11.11. 유대인 가게를 약탈, 방화. 깨진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매운 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부른다. 1939년 9월 마침내 2차 세계 대전이 발발(勃發)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억압은 급속히 증가되었다. 14세 이상 유대인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6세 이상은 손바닥만한 노란색 바탕에 검은 색으로 만들어진 ‘유대인’(Jude)라는 글씨가 적힌 모자(帽子)를 착용하게 했다.
‘유대 민족 말살’은 홀로코스트 첫 번째 단계였다. 아우슈비츠 사령관을 지낸 루돌프 헤스(나치 친위대 대장, 돌격대 대장, 1987 사망)는 1944년까지 40만 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독일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매달 1/5 가량이 죽거나 처형당했다. 다섯 개의 살인 센터가 세워졌다. 소위 ‘샤워실’(Shower)이라고 불렀다. 20~30명씩 샤워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가 죽었다. 대량 학살을 위해 여섯 개의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