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말(島村)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소재 마을이다. 한신계곡을 흘러내리는 지리산 천왕봉 물줄기가 5층폭포, 가내소폭포를 이루며 백무동 마을 앞을 지나 섬말 앞 송알소에 이른다. 지리산 벽소령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이 삼정계곡을 거쳐 실덕 마을 앞 송알소에 이른다. 동으로 백무동 계곡 서로 삼정계곡으로 흐르는 두물이 만나는 지점이 물이 깊은 송알소였다. 어린날 멱도 감고 청년들이 남포불을 던져 물고기도 잡던 곳이다. 섬말 동네는 동서로 냇물이 흐르고 동네 뒤는 곰달래산이 솟아 있어 섬처럼 생긴 마을이다. 큰 버드나무 하나를 턱 걸쳐놓은 다리로 건너다녔다. 홍수 지면 나무 다리는 멀리 떠내려가 버렸다. 다시 나무 다리를 놓곤 했다. 1936년 일제시대 백무동 냇물이 홍수로 넘쳐 흘러 섬말을 휩쓸었다. 우리 어린 날 모래밭을 파면 사기그릇 깨진 것이나 숟가락이 나오곤 했다. 병자년 수파의 피해 영향으로 뒷동산 밑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여 윗동네를 형성했다. 우리집은 동산 아래 논바닥에 지었다. 우리집 위로 두 집은 마천 민선면장을 지낸 강화춘씨댁,그 옆이 강화춘씨 사촌아우 강재춘씨 댁이다. 강화춘씨 아들 강명호 강재춘씨 막내동생 강점조는 나의 어린날 친구였다. 우리집 앞엔 나의 친구 강판조네 집이 있었고 우리집 뒤는 신주식 어머니가 두부장수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순도순 다섯 채 초가집이 이웃이 되어 정답게 살았다. 어른들은 벌써 다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다 객지로 떠나 살게되어 소식을 알 수 없다. 강화춘씨는 지주계급으로 공비의 반동분자가 되어 백무동에 공비 아지트를 둔 공비들이 어느날 섬말 동네로 와서 강화춘씨댁 재산을 다 털어갔다. 집도 강재춘씨 집만 남아 있는데 나의 6촌 형이 살다가 몇 년전 돌아가시어 지금 쓸쓸히 비어 있다. 지금 지리산교회가 서 있는 곳은 우리 고모할머니댁이었다. 그 딸 강두김이 백무동으로 가마타고 시집가는 모습을 초등학교 1학년 때 본 추억이 있다. 강두김 아주머니 아들 신평수가 강청 안터에서 나드리농원 요식업을 하고 있다. 지리산교회 위에 문봉열 그 밑에 박노식 두어살 위의 어린이들이 한동네 함께 살았다. 문봉열 박노식 두 집은 지리산교회 교육관이 서 있다.
1985년에 김태근 목사가 설립한 지리산교회는 서울 강서구 소재 우리 화성교회 장경재(1918-2001) 목사님이 심방하여 기도하고 그 후로 꾸준히 화성교회의 후원을 받았다. 2023년부터 백석교단 이강원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그 지리산교회 앞에 2019년 10월 9일 573돌 한글날에 짚신문학회가 세운 짚신문학창립 20주년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내가 1944년도 부모 따라 귀국하여 할아버지가 삼아준 짚신을 신고 섬말에서 땅벌 ‘가흥’까지 책보퉁이 메고 마천초등학교를 다녔다. 아랫동네 박병천, 아우 오동해하고 같이 동무하며 다녔다. 광복 되던 날 마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면민이 만세 부른 우리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애국심이 가슴에 뭉클했다. 섬말에 살면서 농토가 부족하여 쌀이 없어 보릿고개가 항상 높았다. 쌀밥 한 그릇 먹는 것이 그때 어린이들 소원이었다.
섬말 지리산교회 위 산기슭에 부모님 산소가 있다. 아버지는 순박한 농부로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고 한글을 해득한 여인으로 섬말 동네에서 살았다. 일본에서 낳아온 세 살박이 남동생이 죽어 섬말동네 앞 송알소 아카시아밭에 항아리채 묻혔다. 섬말에서 태어난 어린 다섯 살 정자 누이동생이 이사간 함양읍내 인당 마을에서 죽어 나의 슬픔은 아직도 마음 서럽다. 이제 섬말은 호롱불시대에서 전기시대로 바뀌어 밝게 살고 있다. 송알소 다리 위로 지리산 고속버스가 날마다 달리고 있다. ‘고향의 봄’ 노래 생각나는 어린 날 살던 섬말 동네가 늘 그립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