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유대인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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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히만(A. Eichmann)이 홀로코스트 학살을 주도했다.  나치 통제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은 약 886만 명이었다. 이들 중 593만 명, 67%를 학살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00만 명 이상, 마스다네크에서 138만 명, 트레블링카에서 80만 명, 벨제크에서 60만 명, 켈노에서 34만 명, 소비보르에서 25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독일 국민들은 유대 민족의 대량 학살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따랐다. 나치 친위대 90만 명이 학살에 가담했다.

유대인들은 왜 저항 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지난 1천500여 년 이상 기나긴 박해 속에서 저항을 하는 것이 자신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진 죄악을 인류에게 고발했다. 역사는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처벌과 배상이 필요하다는 것에 국제 사회의 의견이 점차 일치되어 갔다.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에서 전범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1차 재판이 1951년까지 계속되었다. 총 505명의 나치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806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이 중 486명만이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45년 독일에서도 전범(戰犯)들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25년간 12명에게 사형, 98명에게 종신형, 6천 명에게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전범에 대한 추적과 심문은 홀로코스트가 끝난 지 40년 이상 지난 8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학살 주도자 아히히만(Eichmann,1906~1962)은 1962년 5월 31일 자정 무렵 사형에 처해졌다.

고난을 통한 구속(救贖, Redemption)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오래고도 강력한 역동성(力動性)을 부여해 주었다. 빅터 프랭클(V. E. Frankl, 1905~1997)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받았던 형극(荊棘)의 고초(苦楚)가 적나라(赤裸裸)하게 기술되어 있다.

1917년 밸포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국가 연맹 기구가 조직되었다.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1947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벤구리온(D. Ben-Gurion, 1886~1973/ 총리 1948~53)은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새롭게 탄생된 이스라엘을 유대인들은 민족국가로, ‘약속된 땅’으로 그리고 시온주의 국가로 바라본다. 1986년 4월 교항 요한 바오로 2세가 로마시의 유대인 회당을 방문했다. “여러분들은 진정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이며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1970년대 말 이후 미국에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전체 인구의 2.7%이다. 미국 내 소수 민족 중에서 유대인들 만큼 잘 조직되고 지도자들의 지침에 잘 따르는 민족은 없다. 1980년대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이 가장 믿을 만한 동맹이 되었다. 미국 또한 이스라엘이 가장 신뢰할 만한 우방이 되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 앞에 평등사상, 생명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등의 천부(天賦) 인권적 가치를 유대인에게서 얻었다. 개인의식과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평화와 정의를 기반으로 한 사랑,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안식일, 인류가 가진 보편적 윤리의 많은 부분들도 유대인들에게서 얻었다. 유대인들이 없었다면 무의미한 세상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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