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 이야기 (10)

Google+ LinkedIn Katalk +

결혼, 인생의 가장 큰 분기점… ‘가정’ 삶의 버팀목

 우리 집 특별 메뉴는 만둣국…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도 만두 맛을 극찬하셨다

내 입장에서는 학벌도 돈벌이도 변변치 않은 처지다 보니 여대생들이나 그 집안에서 결국은 나를 대등하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청년회 활동을 하는 내내 이성과는 선을 그으려 했고, 간혹 선을 보겠냐는 제의가 와도 “장가 갈 형편이 안 됩니다” 하면서 고사하곤 했다.

그러던 중, 형님을 통해 들어온 선 자리를 거절하기 어려워 나가기로 한 일이 있었다. 주일에 교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농담처럼 조만간 선을 본다고 했다. 그러자 그 권사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박 선생, 그 선 자리 미루어두게.”

의아해하는 나에게 권사님께서는 “내 친척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한번 만나보게”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세종문화회관 앞 카프리 다방에서 이미순 양을 정식으로 만났다. 그 사람이 내 인연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을 때 좋은 인상이 남았고, 그만큼 내가 좋은 인상을 주었을까 싶었다. 이후 편지가 오고 답장을 하면서 지냈지만 아직 결혼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생각에 관계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소개받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무게를 가지게 마련이다. 1년여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 상대로 생각하게 됐고, 여성 쪽 집안에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식을 올리라”고 독촉해 오자 바로 날을 잡았다. 1968년 3월 1일 약혼을 했고, 얼마 후 내 생일인 3월 28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군에서 제대한 지 5년 만이었고, 동대문에서 일을 시작한 바로 그 해였다.

신혼 살림은 수유리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전세방에서 시작했다. 전세가 12만원인가 13만 원이었던 아홉 자 크기의 단칸방으로, 부엌을 주인집과 같이 써야 하는 형태였다. 그 시 절 우리 세대가 대부분 그랬듯, 생활비를 절약해서 계를 들고 적금을 부어가며 돈을 모아 미아리로, 창신동으로, 조금 큰 전세방을 찾아 이사를 다녔다.

네 번째 이사 끝에 신촌 동교동 50만 원 전세방에 살게 됐을 때, 신촌장로교회 교회학교 아동부 부장을 맡게 됐다. 교사 50여 명을 집으로 초대했으면 좋겠는데 방이 좁아서 고민이었다. 아내는 주인집과 상의를 하더니 주인집 안방과 냉장고의 사용 허락을 받았다. 주인은 5·16 이후 군 영관급 출신으로 당시 중앙청 건설부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안집에는 고급 자개장에 큰 냉장고, TV까지 있어서 1960년대로 치면 부잣집에 속했다. 주인집 온 가족이 외출해서 집을 비워준 사이에 놀러온 동료 교사들은 “아니, 이렇게 잘사는 부자셨어요?” 하고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그렇게까지 해서 저희를 초대해주셨느냐”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이었는데도 교회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참 많이도 했다. 없는 살림에 사람들을 초대한다고 하면 타박할 만도 한 데, 적은 돈으로 솜씨 좋게 잔치를 잘 치러내는 아내 덕에 내 인기가 좋았다.

이후 여의도 18평형, 23평형 시범아파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거쳐 지금 살고 있는 서초동 80평형 아파트까지 여러 번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이 집에서는 교사들, 성가대원들 몇 명 잔치는 가능하겠다”고 가늠해보곤 했다. 좁으면 좁은 대로 며칠에 나눠서 손님을 치르기도 했고, 넓으면 넓은 대로 100명이 넘는 손님을 초대하기도 하면서 우리 부부는 평생 즐겁게 교회 손님 초대를 해 왔다. 처갓집이 워낙 손님접대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런 가풍 속에서 살아서인지 아내는 신기하게도 그 많은 사람들의 음식을 적은 예산으로 뚝딱 해내곤 했다. 특히 우리 집의 특별 메뉴는 만둣국이다. 장모님께서 이북 선천 출신이어서 만두 솜씨가 특별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도 우리 집 만두 맛을 극찬하셨다. 그런 장모님 솜씨를 이어받은 아내 이 권사의 만두 맛은 지금껏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 솜씨는 유전인가 보다. 딸아이가 미국 보스턴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보스턴 온누리교회 사람들 30명을 초대해 밥을 해 먹였다”고 해서 아내와 내가 마주 보고 웃은 적이 있다. 아내는 지금껏 살면서 값나가는 반지 하나, 목걸이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 결혼할 때는 형편이 안 돼 못해주었는데, 형편이 펴졌을 때는 하나 해주고 싶었지만 바보 같은 아내는 손사래 쳤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일에 필요하다고 하면 몇 억씩 척척 내놓는, 마음이 예쁜 여자다.

돌아보면, 아내 이미순 권사를 만나 결혼한 일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분기점이다. 내가 온전한 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신앙인으로 서게 된 것은 아내와 가정을 꾸린 시점부터다. 일을 할 때도,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음가짐이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업을 하든 전문직으로 일하든 안정된 가정을 꾸린 사람과 아닌 사람의 발전 속도는 차이가 크다. 일에서 성공하고 잘살기 위해 결혼을 포기했다고 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특히 내가 이제껏 신앙생활을 잘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다. 4~5대째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늦게 믿기 시작한 사람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은 없지만 평생 꾸준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검소하게 살아왔고, 나의 가장 좋은 위로자이자 조력자,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런 아내가 귀하게 여겨질 때마다 새록새록 신기한 사실은 아내의 외가 친척 어른인 김성환 권사님이 이 인연을 만들어주셨다는 것이다. 권사님은 처음에는 병에 걸린 우리 형님을 도와주셨고, 다음에는 우리 형제를 신촌장로교회로 이끌어주셨고, 내게 결정적인 도움이 필요했을 때는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지원해주셨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집안 사람과 중매를 서시기까지 하다니, 무일푼 청년인 나를 왜 그리 좋게 보시고 믿어주셨을까? 나에게서 무엇을 보셨던 것일까?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