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본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기억되는 부분은 맨 첫머리의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것과 끄트머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이다. 이 ‘선언’이 나온 지 1세기 반 만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지구상에서 소멸했다. 중국, 북한 같은 곳에서 공산주의가 이름만 남아 독재체제를 받치는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대한민국에 오늘 몇 개의 유령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도깨비라고도, 귀신이라고도 하는 유령은 마르크스 때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겁을 주며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배회하고 있는 유령은 5.18유령, 세월호 유령, 천안함 유령, 이태원 유령이다. 이들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에서 희생된 영혼의 안식을 사람들은 기원하며 슬픔을 잊어버리고자 하는데도, 이런 저런 기회를 타서 이들의 죽음을 계속해서 기억으로부터 소환하고 기억 안으로 불러들여 민심을 아프게 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하는 무리가 있어 해가 가고 또 가도 좀체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010년 해군 천안함 폭파, 2014년 여객선 세월호 침몰, 2022년 이태원 압사사고는 경건한 추념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검고 컴컴한 의혹의 장막으로 몰아넣는 유령이 되고 있다.
엊그제 개인적인 볼일로 광주광역시를 찾았더니 5월 한달 내내 계속되는 5.18민주화운동 44주년 기념행사의 포스터와 현수막이 많이 눈에 띄었다. 가두행진을 필두로 집회와 문화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데 신영복 서체 검은 글씨의 플래카드들은 5.18민중항쟁 정신을 시민들에게 고취하고 있었다. 광주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이 3.1운동에 버금가는 가까이는 6.29 군정종식 차원의 역사적 사변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데, 이제 민주화된 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아직도 고립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지 염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모두의 오월, 하나되는 오월, May of All, May of One”이라는 주제어가 지역의 범위를 넘어서 온 나라와 세계를 향한 외침으로 들려 다행스럽다.
기념할 것은 기념하고 잊을 것은 잊어야 사회가 평안하게 발전한다. 10년전 세월호의 침몰로 수학여행길에 오른 남녀 고교생이 대부분인 306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은 그 비극을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재작년 10월, 서양에서 유래한 할로윈 축제를 여기서도 즐기려고 국제거리 이태원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이 비탈진 좁은 골목길에서 밀리고 눌려 숨막혀 죽어간 그 슬픈 일을 어찌 사람들이 쉽게 잊으며, 서해 북방한계선을 지키던 천안함이 한방의 폭음과 함께 두 동강이 나고 46명의 해군장병이 순직한 그 희생을 어이 우리가 잊겠는가! 하지만 이미 파헤칠 대로 파헤쳐 모든 사실이 정리된 지금에도 ‘진실규명’과 책임자 응징을 요구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다른 목적과 의도가 있음을 이제 모두가 안다.
유물론자들의 공산당 선언 같은 주장은 비록 한때 유럽의 사상계를 흔들고 장기간 여러 나라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심과 증오심에 호소하여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만들어 냈기에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우리가 진실에 대한 믿음으로 갖가지 유령을 동원한 음모와 선동을 걷어차버릴 때다. 이땅에 유령은 없다.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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