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덥다 보니 거리에 젊은이들의 배꼽티가 등장하고 있다. 남성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배꼽티, 과감한 노출 패션이다. 젊은이들은 배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고대희랍에서는 정욕의 원천이 배꼽인데, 서양의 유령들은 배꼽이 없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유령에게는 정욕이 없기 때문에 배꼽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와 반대다. 처녀 귀신에게 총각 귀신이 주먹만 한 배꼽을 달고 나타난다고 했다. 이같이 배꼽에 대해 동서양이 다른 의식인데도 그 공통점을 찾는다면 틀림없이 정욕의 상징 부위라는 점이다.
조선 시대의 일이다. 궁중에서 세자빈을 간택할 때 의녀(醫女)를 규수방에 보내어 은밀히 배꼽을 보도록 했다. 이유는 배꼽 머리가 상향이면 아들을 잘 낳고, 배꼽 중심부위에 털이 있으면 귀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이다. 세자빈 간택에 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중요한 하나는 배꼽의 모양이다. 둥그냐, 갸름하느냐에 따라 대궐 안이 편안하느냐, 시끄럽느냐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명말(明末)의 학자 이어(李漁)가 쓴 여체론(女體論)에 의하면 배꼽을 치부(恥部)로 여겼다. 남에게 보일 수 없는 부위라고 했다. 여성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가려야 할 부위가 곧 배꼽이기에 그렇다.
한편 서양 미술가 테스먼드 모리스는 ‘맨워칭’ 이란 저서에서 미술사에 나오는 200여 점의 누드 그림의 배꼽 형태를 분석해 보았다고 했다. 고대 것은 92%가 둥글고 현대 것은 54%였는데 그 형태에 따라 정욕의 차이가 주어진다고 했다.
배꼽티, 대담한 신세대들의 거리 패션이다. 과감히 노출 시킨 패션이다. 그러기에 자극을 주는 패션이요, 자극을 받는 패션이다. 젊은 세대들은 현대감각이 없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라고 일축할지도 모른다. 15세기경부터 여체를 지상 최고의 미로 여겨 많은 화가들은 앞을 다투어가며 누드를 그려왔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육체의 개방을 요구하는 세태로 누드선집까지 나와 그것이 예술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세계 도처 해수욕장에서 알몸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시대인데 무슨 말을 하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배꼽티가 좋다는 말인가? 모든 문화는 항상 발전하는 것이 정상이다. 원시 문화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상문화가 끊임없이 발전해 왔고 인류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그 문화가 후퇴한다면 그것도 발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의식의 변화로 인해 발전했던 문화가 원시로 되돌릴 수 없다. 인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부르실 때 왜 숨어서 나오지 못했는가. 전부터 벗고 지내왔던 몸인데도 어찌 새삼 옷 벗은 것을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그 부위를 가리고 나왔던가.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 때문이다. 옷을 벗음은 죄의 상징임을 말해주고 있다.
배꼽티로 성적인 분별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 부위를 살짝 가려 은은한 매력을 이룬다면 어떨까. 그것마저 거절하는 젊은이들이 있을까? 어떠한 과정이든 그 역경을 넘지 않고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없다. 한 번쯤 깊이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