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교 총회, 한국에 처음 선교사 파송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오늘밤 당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면 어디로 갈 줄 아십니까?”
바로 그 순간 테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부흥회가 다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테이트만은 혼자 교회당에 남아 눈물로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하였다.
‘옳지,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은 천국이야.’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테이트는 자신의 진로를 바꾸어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하였다. 테이트는 맥코믹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열심히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어려웠던 히브리어도 거뜬히 해낼 수 있었으며, 이미 의과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기 때문에 헬라어도 많이 힘들이지 않고 배울 수 있었다.
이미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생들이 목사가 되어 미국 내는 물론 해외 선교사로 많이 나가 있었다. 그 중에는 중국과 일본으로 나간 이들도 있었으며, 모두들 성공적으로 선교 사역에 임하고 있다는 교수들의 보고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가 졸업반이던 그 당시에 한국에서 안식년을 맞이하여 왔다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 보고는 그를 한국으로 인도하는 데 참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테이트 남매 선교사
테이트가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다는 소식이 테이트가(家)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 메티 테이트(Miss M. Tate)가 듣고는 자신도 선교사로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테이트는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둘이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라 동생 메티 테이트도 함께 지원하는 것을 환영했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를 지원했던 사람들은 이들 남매만이 아니었다. 다음에 자세하게 기술하겠지만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 전킨 선교사 부부, 그리고 미혼의 데이비스(Miss L. Davis) 선교사도 이들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드디어 1892년 9월 7일 내슈빌에서 미국 남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 주최로 파송예배가 진행되었다. 이때 테이트 선교사의 부모를 비롯해서 여러 친지들이 파송예배에 참가하였다. 이들 남매만의 파송예배가 아니라 그 외 전킨 부부, 레이놀즈 부부, 데이비스 이렇게 7인의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렸다. 더욱이 미국 남장로교 총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남다른 관심들이 많았다.
테이트 남매와 데이비스, 이 3명의 선교사가 제1진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다. 청명한 가을 하늘은 이들의 선교 여정을 환영이나 하는 듯 날씨가 좋았다. 이러한 날이 밤낮 가리지 않고 25일이나 계속되었다. 원래 성격이 쾌활했던 테이트는 갑판 위에 올라가서도 찬송을 불렀고, 기도도 큰 소리로 수없이 반복해서 하였다.
미국을 떠났던 테이트 선교사 일행은 그 해 10월 중순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연락을 하여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훌턴 선교사가 마중을 나왔다. 당시 훌턴 선교사는 동경에 있는 메이지학원 신학부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그의 마중은 참으로 반가웠다.
1852년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의 여러 교파에서는 일본에 있는 미국인을 위한 신앙 지도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모여 있던 곳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중 요코하마를 비롯해서 동경 그리고 일본 서남부쪽의 관문인 규슈 남단에 있는 나가사키 등에 많이 모여 살았다.
한편 메이지유신이 단행되면서 동경에 있는 막부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이 막부정권 아래에서 정권을 누린 많은 사람들이 낙향을 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들이 낙향할 무렵 이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요코하마에도 바라 선교사가 설립한 바라숙이 설립되었으며, 바라숙에 다녔던 학생들이 바라 선교사의 인격에 감동되어 1892년에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요코하마에 있는 가이칸 교회가 되었다. 이 가이칸 교회는 일본에 있어서는 최초의 개신교회가 되었다. 그후 동경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교회를 설립하는 일은 쉬웠지만 일본인 교회를 이끌어 가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많았다. 그래서 미국 장로교회의 헵번 선교사는 동경에 메이지학원을 설립하고 그 학원 안에 신학부를 개설하여 일본 장로교회 목회자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미국 남장로교회에서도 유능한 목회자를 양성하려면 유능한 교수를 파송해야 한다면서 일본으로 선교사를 보냈는데 그가 바로 훌턴 선교사였다.
홀턴 선교사의 영접을 받은 테이트 선교사 남매와 데이비스는 피곤함도 잊은 채 훌턴 선교사의 선교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날을 보냈다. 그후 일행 중 데이비스 선교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같이 동승했던 한국인 부인과 함께 한국의 인천을 향해 떠나 1892년 10월 18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한편 미국에서 같이 떠나기로 되어 있었던 다른 일행들은 그후에 미국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들 일행은 테이트 남매와 일본 요코하마에서 합류하여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레이놀즈 부부와 전킨 부부였다. 이들이 테이트 남매와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떠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전킨 선교사가 미국을 떠날 무렵 갑자기 후두염에 걸리자 덴버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놀즈 부부도 전킨 선교사가 완쾌되면 그의 부인과 함께 떠나기로 하고, 다른 일행들이 먼저 한국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홀턴 선교사와 오랜 시간을 보냈던 테이트 선교사 남매도 전킨,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들이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자 함께 한국으로 출발하여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전주에 첫 기독교 전파
서울에 도착한 테이트 남매와 다른 일행들은 서대문에 임시 숙소를 정하고 매일같이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해서 공부하였다. 특별히 테이트는 맥코믹신학교 선배인 마펫(S. A. Moffett, 한국 명: 마포삼열) 선교사의 사랑을 받으면서 최초로 평양까지 선교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선교 여행은 훗날 테이트가 선교 사역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바쁜 여정 속에서도 그 혹독한 서울의 겨울을 무사히 넘겼으며 어느덧 해가 바뀌어 1893년 1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1월 28일 서울 시내 연동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 북장로 선교회 소속 빈턴(C. C. Vinton) 선교사 집에서 미국 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회 미션공의회’를 조직하고, 여기서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을 받고 한국에 와 있는 선교사들의 선교구역을 결정하였다. 다행히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받아 온 선교사들은 기후의 조건을 고려하여 호남지방을 선교 구역으로 할당받았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