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수]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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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강직한 사람’으로 인식

고매한 인격 소유자 · 애국자 · 학자 · 기도의 사람

한국교회사에 많은 순교자가 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순교자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들이 뿌려낸 예수의 피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소홀히 하거나 잊을 수 없는 우리 교회의 숭고한 신앙유산이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의 발자취가 어려 있는 평양에서 올곧은 신앙으로 부끄럼 없는 신앙 선배의 모습을 보여준 고 김철훈 목사의 삶은 고귀한 흔적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강직한 사람’으로 순교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는 김철훈 목사는 1904년 10월 7일 아버지 김경덕 목사와 어머니 안독신 사모의 3남으로 태어났다. 김경덕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1923년 제16회로 졸업하고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3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41년 3월부터 1943년 12월 어간에 2차에 걸쳐 미국 정부의 첩자 혐의로 검거되었다. 이 일로 9개월을 감옥에서 살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그는 결국 후유증으로 순직하였다.

김철훈(金哲勳)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요시찰인물로 ‘찍혔을’ 정도로 특별한 인물이었다. 김철훈이 초등학교 4학년 때 교장이 “독립운동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학생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김철훈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항상 머슴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언젠가는 독립해서 살고 싶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우리끼리 살겠다고 주장하고 운동하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교장은 당장 그를 학교에서 쫓아냈다. 그런데 쫓겨난 김철훈이 집에도 안 가고 밤새도록 교실 밖에서 울자 교장은 다음 날 아침 학교에 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김철훈 목사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었다. 그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리고 학자였다. 언제나 서재에서 손님을 맞았고, 서재에는 책이 꽉 차 있었다. 김철훈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새벽에 강대 밑에 꿇어 엎드려 아침 해가 떠오르기까지 기도했고, 산에 올라가서 며칠씩 기도했다. 불의와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다.

북한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는 신앙을 지켜 평양성의 순교 제물이 되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김철훈 목사는 이 성경말씀대로 살았던 것이다.

당시 교계에는 민족주의 독립사상이 강하게 작용했다. 민족대표들이 잡혀가자 우국지사들이 모여 이 운동을 계승하여 도 대표들이 3월 12일 서울 서린동 중국집 영흥관에 모였다. 여기에 양평교회의 김경덕, 문성호, 백관형 등도 있었다.

조선독립은 2천만 동포의 소망이요, 우리는 33인의 민족대표자의 후계자로 조선독립을 요구한다는 요지의 애원서를 만들어 차상진, 문성호가 총독부에 제출하고 김백원, 문일평, 김경덕, 조형균 등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시민을 모아 문일평이 애원서를 낭독한 후 시가행진을 하면서 만세시위를 했다. 이로 인해 대표들은 경찰에 잡혀 호되게 취조를 받았다. 김경덕 목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2심에서 3년 8월의 선고를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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