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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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선교사 신기하게 여겨… 한국어 설교 경청

드디어 1893년 3월 날씨도 풀리고 남풍이 서서히 불어오는 계절을 택하여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도 레이놀즈 선교사의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어 전주에 선교사들이 정착하고 선교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이때 정해원은 전주천 건너편에 있는 은송리 마을에 아담한 초가집 한 채를 26달러에 구입한 후 선교사가 생활할 수 있도록 잘 단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해원은 서울 정동에 있는 새문안교회의 출석 교인으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정해원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복을 그냥 혼자서 간직할 수가 없어서 은송리 마을을 다니면서 선교사가 거처할 집으로 주민들을 초청하였다. 그리고 정해원은 그들에게 전도 강연을 실시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도 서양문화가 들어와서 개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도 원래 철저한 유교를 숭상했던 유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는 양반·천민 구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정해원의 신앙 간증을 들은 은송리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한 젊은 청년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선생님, 저는 전주에서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예수를 믿어도 괜찮습니까?

조선이 출범하면서 전주는 전라도의 도읍지가 되었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내려온 도시였기에 전주처럼 살기 좋은 도읍지가 없다 하면서 남한에서도 돈 많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전주로 모여들던 터였다. 남한에서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가 전주였다고 한다.

이러한 도시 변두리에 사는 은송리 사람들은 전주 양반들 틈에 끼여 늘 천민으로 차별을 받고 살아가던 실정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소리에 은송리에 사는 젊은 청년은 물론 부녀자들까지 기대하면서 정해원 곁으로 모여들었다.

정해원은 언더우드 선교사를 잘 도왔기 때문에 레이놀즈 선교사는 그에게 큰 직분을 하나 주었다. 그것은 조사였다. 정해원 조사는 선교사 주택을 마련한 후로도 계속해서 조사 겸 전도사의 역할을 하면서 주일이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인도하였다. 정해원 조사는 선교사 주택에 모여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침과 동시에 간단한 찬송도 가르쳤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찬 411장)

은송리 마을에 울려퍼진 찬송 

성경을 펴들고 설교를 할 때에 그 좁은 선교사 주택에 가득 차 있는 은송리 마을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정해원 조사의 열심있는 기도로 전주교회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이것이 전주 서문교회의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전주 서문교회에서도 정해원 조사가 설립한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창립 기념주일을 매년 지켜오고 있다.

당시 전주와 서울을 왕래하려면 지금과는 달리 교통수단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보통 서울에서 출발하면 6일간이나 걸렸다. 그렇다고 6일간의 그 기나긴 거리를 자주 다닐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선교사들은 정해원 조사의 활동에 대해서 퍽 궁금해 하였다. 그래서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는 1893년 9월을 맞이하여 전주에 있는 정해원 조사를 만나기 위해 출발하였다. 서울과 전주의 6일간이란 긴 여정의 시간 동안 소요될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등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를 돕는 5~6명 의 사람들도 같이 출발하였다. 그 머나먼 거리를 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장차 자신의 선교 구역이 호남 땅이기에 힘들어도 기쁨으로 전주를 향해서 달려갔다.

그런데 전주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 때아닌 가을 장맛비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임할 선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시련으로 주는 것으로 알고 전주성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만경강 상류를 지나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전킨 선교사가 발을 잘못 딛는 실수로 강물에 떠내려가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논에서 일하는 한국인 농부를 통해 강물에 떠내려가는 선교사를 겨우 건져내게 하셨다.

그들은 함께 동행한 돕는 이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전주 성문 밖 은송리의 정해원을 찾을 수 있었다. 정해원 조사는 매일같이 선교사들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실의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해원 조사는 테이트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를 만나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선교사들은 정해원 조사의 활동 상황을 자세히 듣고 일일이 교인들을 만나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일은 2주간 머무는 동안 주일 아침 예배에 은송리 마을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은송리의 선교사 주택에 모여 예배를 드린 일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는 정해원 조사의 끊임없는 노력이 컸다. 이 날 은송리 마을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보는 순간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장대한 키에 머리는 노랗고, 코도 모두 덜렁 튀어나와 있고, 얼굴색도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날 주일에는 서양 선교사를 구경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더 많아서 정해원 조사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비록 서툰 한국어였지만 테이트 선교사는 또박또박 한국어로 설교를 하였다. 은송리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교를 경청하였다. 어떤 사람은 미국 사람들도 한국어로 말을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하루를 지냈는데 어느덧 그 소식은 바람을 타고 은송리 건너 마을에 있는 전주 읍내 사람들의 귀에까지 퍼져 갔다. “아니, 양반 고을에 웬 양놈이 들어오다니. 이럴 수가 있어? 우리가 가서 쫓아내야지.”

향교에 모였던 유생들이 흥분을 한 나머지 은송리를 향해서 떼를 지어 몰려왔다. 이때 선교사들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주님, 저들이 이 귀한 진리를 모르고 우리를 향해 해코지를 하려고 합니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곧 집을 부술 것 같았던 유생들은 하나 둘씩 물러갔고 남아 있는 사람은 은송리 마을 사람들과 테이트 및 전킨 선교사뿐이었다. 극적인 장면을 목격한 테이트와 전킨은 그날 밤을 철야로 지새우면서 기도에 힘을 쏟았다. 여기에 정해원 조사도 합류했으며, 선교사를 전주까지 안내했던 이들도 합류하여 어느덧 선교사 주택에는 성령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선교사와 여행을 돕던 이들은 2주간의 일정을 다 마치고 상경길에 올랐다. 역시 전주를 빠져나갈 때 언제 소식을 알고 왔는지 유생들이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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