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혜] 이자익 목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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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총회는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로 처음 출발하였는데, 이때 평북, 평남, 황해, 함경, 경충, 경상, 전라대리회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12년 9월 1일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총회를 결성하였다. 1907년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09년에는 ‘백만명구령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12년에 부흥의 결실로 총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07년의 독노회부터 1912년의 최초의 총회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즉 장로교 독노회 기간 동안에는 회의의 처음과 마지막의 총대 수가 동일하였다고 한다. 1907년부터 1912년 사이의 회의록에 따르면 모여서 속회할 때마다 출석을 불러도 그 숫자가 “여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오늘날의 회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총대들의 열심을 엿볼 수 있다. 

총회 총대가 총회 기간 중에 자리를 이탈하고 결석하는 일은 1924년이나 그 이전부터였던 것 같다. 1924년 제13회 총회가 함흥 신창리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시골교회인 김제 금산교회 이자익 목사가 예상을 깨고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총회장으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통과시켰다.

“금후로는 총회 총대가 폐회 전에 특별한 사고가 있으면 허락을 받고 행동을 할 일이며, 허락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경우는 여비를 지불하지 않기로 하며, 총회 허락 없이 조퇴하는 총대는 다시 노회에서 총대로 선출하지 않기로 동의가 가결하다.”(제13회 총회록 47쪽) 

총회 총대들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엄격한 원칙을 적용한 결의였다. 이는 이자익 목사 외에는 아무도 결의할 수 없었던 단호한 조치였다. 이 결의가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총회는 첫날만 지나면 자리를 많이 비우는 나쁜 버릇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총회장도 없다. 

이자익 목사는 총회장이 되는데 빚진 사람이 없었다. 즉 선거 운동 없이 당선된 최초의 시골교회 목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어떤 인물이나 집단과도 정치적인 거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사심 없이 법과 원칙에 의하여 총회를 이끌었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던 소신 있는 한국교회 최고의 법통이었다. 총회나 노회의 법 집행은 공평한가? 이자익 목사 같은 총회장이 그립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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