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기회 필사적 매달림… 질문보다 큰 그림 그려
한번 뛰어든 다음엔 앞으로만 나아갔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더 몰입하고 집중
내 영어가 짧은 편이라 스마트폰 사전으로 단어를 찾아가며 말해야 했지만, 청년의 태도가 어찌나 진지한지 나도 덩달아 집중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때 내가 한 이야기도 수련회에서 만난 청년에게 해준 말과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 서른 살인 당신이 마흔이 되는 2022년이면 인생의 절정기가 된다. 세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특히 중국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변할 것이다. 이제 취직을 하게 된다면 3~4년 성실히 일하되 그 일에만 파묻히지 말고 세상을 배워라. 너는 그동안 수도 없이 수재,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을 것이다. 엘리트일수록 우물 안 개구리 처지에서 반복적으로 계속 탈출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늘 ‘내가 이 회사 사장이라면?’이라는 질문을 해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집중하고 몰입하라. 몰입의 ‘순도’가 높아지면 통찰력이 생기고, 그 분야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가 보인다. 그 능력은 배우는 것이 아니고 터득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비즈니스의 유형과 생태, 매력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 비즈니스와 중국 비즈니스의 역학관계에 대해서도 내가 아는 최대한 설명했다. 청년이 어찌나 몰입해서 듣던지 우리는 점심식사도 포기했다. 미국 국내선에서는 기내식을 카트에서 사 먹어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영어로 누군가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해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청년이 최대한 내 수준에 맞게 질문하고, 내 부족한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적절한 단어들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 청년은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보스턴에 체류하는 기간에 한 번 더 만나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딸네 집에 머무는 동안 MIT대학교 그의 연구실까지 찾아가서 한 번 더 만났다. 이때는 딸이 동행해서 통역을 해주었기 때문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처럼 배울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자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드는 그의 자세를 보니, 오늘의 중국이 G2의 자리에 그냥 올라선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진로를 놓고 고민하는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에게도 그들과 같은 갈급함이 있었다. 다만 그 갈급함의 정도가 조금 달랐을 뿐이다. 나는 그야말로 맨몸이었기에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가 일을 찾고 일을 만들어갔던 것은 나에게 어떤 철학이나 남다른 경영학적 가치관이 있어서, 혹은 사회의 흐름과 미래 전망에 대한 식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목마른 사슴처럼 살아갈 방법을 갈구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남들은 스쳐 지나갈 만한 평범한 기회도 필사적으로 붙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입문한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방정식을 찾아내는 습관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질문과 해답을 찾아내는 속도가 빨라졌고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질문의 크기보다 열 배나 더 큰 그림도 그려낼 수 있었다. 한번 뛰어든 다음에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갔다. 다른 선택의 여지, 다른 살아갈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더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다
군에서 제대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시기에 나는 “무슨 일이든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고, 그 응답으로 주일학교 교사 일을 먼저 하게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내 일도 시작됐다. 그 계기는 형님과 대화를 나누던 형수님의 말씀 한 토막에서 비롯됐다.
“이북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며 형제처럼 지내던 동생 남편이 청주에서 중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동대문에서 원단 장사를 한다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오셨지 뭐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학교 선생님은 은행원과 더불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이었다.
‘어째서 그 좋은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왔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자 그 장사에 대해 꼭 알고 싶어졌다. 형수님께 그분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나보니 인상이 선한, 형님뻘 되는 분이었다.
“형님이 동대문에서 하는 사업이 갑자기 커져서 재무관리를 도와주려고 올라온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배우다 보면 제 사업도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형수님께 얼핏 들었을 때는 도매상이 있고 소매상 단계가 있는 ‘포목장사’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어볼수록 큰 사업이었다. 특히 단순한 원단 도‧소매업만이 아니라 국내에 없는 새로운 패션 원단을 개발‧생산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세상이 있었나? 이런 사업이 있었나?’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비즈니스 세계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전율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기존의 생산공장을 활용해 자유자재로 자기 상품을 개발하고 유통하는 ‘컨버터 비즈니스’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리 집안에는 크건 작건 사업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쪽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던 내게는 모든 것이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날 처음 만난 분인데도 염치 불구하고 “형님, 저 그 일 좀 하게 해주십시오”하며 매달렸다. 그전까지 나는 일가친척이 아닌 누구에게도 ‘형님’이라 부르며 능청 떠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뒤 내내 의기소침하게 지냈던 나로서는 처음으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셈이다. 중학교 때 한 달간 영등포역 미군 PX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체득했던 배짱과 넉살이 나도 모르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사정사정하며 매달리는 내게 그분은 손사래를 쳤다.
“안 됩니다. 지금은 사람을 구하지 않아요. 일할 자리가 없어요.”
“월급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허드렛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일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저도 이제 일 시작한지 석 달밖에 안 됐는데 무슨 결정권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아무리 말씀하셔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