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테올로기아(theologia)라고 한다. 이 말은 2세기에 동방교회의 유스티누스(Justinus)가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는 이단과 적대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변증하던 호교론자였다. 신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라진다면 신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세상 학문은 신(神)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문이라는 말은 철학을 일컫는 필로소피(Philosophy)나 과학을 의미하는 사이언스(Science)를 지칭하는데, 그 뜻은 앎(지식)을 의미한다. 그 앎의 내용은 인간에 대한 지식과 자연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 앎에 대한 논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철학도 과학도 신(神)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 이들의 눈에 신학은 학문으로 인정할 수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입증할 수도 없고 반증할 수도 없는 신(神)을 당연한 것으로 정해놓고 시작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학문의 왕’이라느니,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교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다수가 되고 세상의 권력을 좌우할 만한 힘이 있을 때 신학 앞에 세상 학문이 고개를 숙이지만, 교회가 문을 닫을 때 신학은 조롱거리와 천덕꾸러기가 된다. 아니면 구경꾼도 없는 운동장에서 자기들만의 리그를 즐기는 집단이 될 수 있다.
신학이 살 길은 교회를 보호하고 변증하는 호교론적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회의 믿는 바를 허무는 행위는 신학이 망하는 길이다. 교회가 믿는바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믿는다.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고 심판을 믿는다.
오늘날 이단들이나 세상 학문이 창조론을 부정하고, 남자나 여자 외에 다른 성을 조장하고, 구원의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신앙고백을 조롱하고 공격한다. 신학이 세상 학문의 시녀를 자청하여 이들의 주장에 편승하면 안 된다. 오히려 호교론적 정신으로 교회의 신앙고백을 보호하고 사수해야 한다.
교회가 있고 신학이 있는 것이다. 교회가 무너질 때 신학은 설 자리가 없으며, 따라서 교회 없는 신학은 공허한 사이비 철학에 불과하다. 교회가 잘못되면 신학은 몰락할 수 있다.
문성모 목사
<전 서울장신대 총장•한국찬송가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