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회장, 평생 잊을 수 없는 사업의 스승·선배
주인의식 가지고 책임경영 하라는 뜻,
김 회장의 동업자로 인정 받는 기적
그렇게 분명하게 거절을 당하고도 나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없는 사람처럼 다음날 아침 일찍 동대문 점포로 나갔다. 젊은 날의 꿈과 열정이 오롯이 담긴, 내 삶의 무대가 된 동대문 광장시장에서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점포에 나간 날, 그분이 말씀하신 형님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분은 동대문 원단 섬유사업의 1인자 김교석 회장이었다.
가게의 여러 사람에게도 인사를 하면서 “열심히 일할 테니 아무 일이라도 시켜만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곱지 않은 시선만 돌아왔다. 아무도 채용한 적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나와 일한다는 사람을 좋게 봐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 않고 아침 일찍 나가 밤 9시가 넘도록 일했다. 지각도 조퇴도 결석도 안 했다. 출근하자마자 가게를 청소하고 창고를 정리했다. 짐을 옮겨야 할 일이 있으면 재빨리 나섰고, 엄청난 물량의 창고 물건 정리도 도맡아 했다. 한나절 내내 한 롤에 2~5kg에 달하는 원단을 차에서 내리거나 창고에서 운반하는 일을 하다 보면 젓가락질도 할 수 없을 만큼 팔이 후들거리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 보니 가게 직원들은 대부분 김 회장과 동업하는 이들의 일가친척이거나 동향 친구의 자녀 또는 친척들이었다. 나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허드렛일만 시킬 뿐, 제대로 된 일을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점심도 다른 이들은 회사 비용으로 함께 먹었지만 나는 내 돈으로 따로 혼자 사먹어야 했다.
그렇게 월급 한 푼 받지 않고 일한 날이 6개월을 넘어서자 내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나를 원래부터 있었던 직원인 양 여기게 됐다. 간혹 수년씩 종사한 직원들보다 일을 잘 해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하고 새로운 일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저 어깨 너머로 터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 회장은 광장시장 건물 3층에 사무실을 두고 1층의 여러 요지에 위치한 점포들을 수시로 둘러봤다. 내가 일하는 가게에도 자주 들렀지만 말 한마디 붙여볼 기회도 없었고, 나는 그저 묵묵히 짐을 져나르며 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회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자네, 이름이 뭔가?”
“박래창이라고 합니다.”
내 신상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봤지만 그뿐이었다. 그 뒤로 김 회장은 오가는 길에 나를 보면 눈길을 주었다. 간단히 말을 건네는 일이 많아졌고 표정도 호의적이었다. 뭔가 처지가 나아지려나보다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뭐라도 좋으니 책임을 맡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일은 그만 나오게”라는 말만 듣지 않았으면 할 때도 많았다.
일하면서 살펴보니, 김교석 회장 밑으로 중요한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이 분야별로 대여섯 명이나 있었다. 내가 처음 일을 부탁했던 중학교 교사 출신인 분까지 두 명은 김 회장의 친동생이고, 한 명은 매제, 한 명은 조카였다. 친구 아들 두 명에 직원들까지 도합 20명이 대체로 그런 친인척 및 지인 관계에 있었다.
지금도 그런 문화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데, 그때만 해도 뭐든 일거리가 생기고 도움이 필요하면 시골에 있는 친척을 불러올릴지언정 절대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런 문화를 동대문시장 안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즈음, 놀라온 일이 생겼다. 김 회장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내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제안을 했다. 내 상상을 초월하는 제안이었다.
“내가 자네한테 점포를 하나 맡겨보고 싶은데 운영해볼 수 있겠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사업의 스승이자 선배이며, 또한 동지이기도 했던 김 회장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분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6개월간 성실하게 일한 나를 줄곧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는 화학섬유, 합성섬유가 개발‧생산되면서 한국의 섬유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던 시기로, 오늘날의 SK인 선경을 비롯해서 제일모직, 코오롱, 한일합섬, 방림방적 등이 직물과 합성섬유 회사로서 막 성장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다.
상품개발 영역이 늘어나고 사업이 커지자 김 회장은 신상품이 개발될 때마다 새로운 점포를 오픈했다. 이때의 점포는 일종의 계열사였다. 별도의 영업감찰을 낸 사업체이지만 사업적으로는 김 회장의 모기업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이런 점포를 하나 새로 내기 위해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찾고 있던 김 회장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이다.
“얼마나 투자할 수 있나?”하고 묻기에 “한 200만 원 정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다. 김 회장은 흔쾌히 받아줬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책임경영을 하라는 뜻일세”라면서 곧바로 나를 동업자로 대해줬다.
방을 나서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행운이, 꿈같은 일이, 기적이 일어났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200만 원이라는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순간적으로 ‘김 회장의 동업자’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가 깨고 보니 아찔했다. 호기롭게 “바로 200만 원을 준비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막막했다.
기회와 가능성의 무대, 동대문시장
고민 끝에 김성환 권사님에게 돈을 빌렸고, 그 인연이 아내를 만나는 데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앞장에서 이미 했다. 그렇게 한 고비는 넘었는데, 그렇다고 바로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말이 동업자지, 한동안은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김 회장의 주변에 겹겹이 포진해 있는 일가친척들을 뚫고서 중요한 업무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에 내게 우연한 기회가 생겼다. 그 시점에 형님은 신세계 백화점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백화점에서 ‘바겐세일’을 하는 문화가 처음 생겼다. 롯데와 신세계 백화점이 처음 시도한 것이다. 연말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 신세계 백화점 전 점포가 바겐세일을 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형님께 들었다.
며칠 전 창고 정리를 하며 지난해 여름 옷감이 재고로 남아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여성용 여름 치마, 저고릿감 원단들이었다. 나는 곧바로 신세계 백화점 담당자를 찾아가서 매대 하나를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담당자는 한겨울에 여름 옷감이 팔릴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소매가보다 훨씬 싼 값에 내놓겠다고 하니 바겐세일의 취지에 맞다고 판단해 매대를 내줬다. 봉고차도 없던 시절이라 동대문에서 소공동까지 손수레에 원단을 실어 나르며 준비를 했다.
박래창 장로
<소망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