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부터 나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게 세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는 교통사고였다. 의사로서 환자를 많이 보다 보면 긴장이 쌓인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감이 상당하다. 나는 그 스트레스를 운전을 통해서 풀었다. 그때는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전쟁 중인 베트남에서 배운 운전이라 난폭하기도 했다.
6시나 7시가 되면 병원 문을 닫고 아는 택시 기사 차를 빌려서 설악산을 비롯해 먼 길을 갔다 오곤 했다. 그날도 일찍 일을 끝내고 택시를 몰고 속력을 내어 시골길을 달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속초 부근 산길을 지날 때였다. 길의 오른쪽은 낭떠러지였는데 갑자기 핸들이 꺾이지 않았다.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사가 “위험합니다!” 하면서 핸들에 손을 살짝 댔는데, 차가 그만 반대편으로 네댓번 정도 굴렀다.
“원장님!”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땅에 엎드려 있었다.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팔을 흔들어보니 오른쪽 팔이 따로 놀았다. 골절이었다. 더 놀란 점은 차가 구른 다음 멈춰 섰을 때 내 몸의 절반이 차가 구르는 방향으로 차 밖에 나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상황에서 차가 한 번만 더 굴렀다면 현장에서 차에 깔려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된 시각이었지만 다행히 지나던 택시가 있어서 인근 병원에 가서 우선 얼굴을 꿰매고, 다음 날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골절수술을 했다. 퇴원하고 집에 와서도 한동안 한 손으로 진료를 해야만 했다. 그때는 그냥 ‘죽을 뻔하다 살았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몇 달 후, 두 번째 큰 사건이 있었다.
페니실린이 부작용이 많아지면서 쇼크가 일어나 사람이 죽기도 하고, 내성균도 생기기 시작해서 ‘엠피실린’이라는 대체 약품을 썼는데 이 약도 부작용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주사를 놓기 전에 꼭 테스트를 했다. 피내(皮內) 테스트라는 것인데 소량의 약물을 피부에 주입해 환자의 과민 반응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루는 평소 안면이 좀 있는 67세 할머니가 아들하고 같이 왔는데 아들이 내 나이와 비슷했다. 기침하고 열이 있어서 급성 기관지염으로 진단을 내리고 엠피실린 처방을 냈다. 내가 가장 신임하는 간호사에게 테스트를 부탁했다.
얼마 후 다급하게 간호사가 “원장님, 원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으로 얼른 가서 보니까, 넘어가는 할머니를 아들이 받치고 있었다. 얼른 인공호흡을 하면서 마취기를 가져오도록 했다. 마취기를 가지러 가는 도중에 할머니의 심장이 딱 서버렸다. 심장이 멈추니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었다. 할머니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의대에서 페니실린 쇼크에 대해서 배우면서 테스트에도 죽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책에나 나오는 그런 일이 내게 생기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후 문상이라도 갔으면 좋았을 걸, 문상을 안 간 것이 그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 자기 병원에서 죽었으면 문상이라도 와야지.”
아마 내가 문상을 갔어도 욕을 먹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게 발단이 되어 부검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부검 결과, 기관지염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오진은 아니어서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좀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성인 남자 한 명이 피부염으로 병원에 왔다. 평소 피부 치료를 꽤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이 사람은 잘 낫지 않았다. 여러 가지 처방을 하다 마지막으로 ‘포타슘 클로라이드’를 썼다. 이 약은 설사하는 환자의 링거에 섞어서 주기도 하는 것으로 혈관에 직접 주사할 때는 농도 조절을 잘 해야 했다. 조금 많이 넣게 되면 피부가 썩기도 하는데 혈액 안에 들어가면 괜찮았다. 이것저것 해봐도 안 돼서 이 약을 처방하고 주사하려는데 수술이 급한 응급환자가 실려 왔다. 그래서 내가 주사를 못하고 간호사에게 맡겼다.
“주사 넣다가 환자가 아프다고 하면 무조건 빼요.”
수술하고 나왔는데 난리가 났다. 간호사 말로는 환자가 아프다고는 하는데 붓지도 않고 해서 “에이, 아저씨 엄살 좀 그만 부리세요” 하면서 주사를 했다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이틀째 됐을 때 주사 부위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나는 그 부위를 째고 씻어낸 다음 꿰매자고 했다. 그런데 환자가 거부했다. 속상하고 답답한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 환자는 서울대학 병원에 가야겠다고 해서 병원 사무장과 갔다 오고는 또 얼마 있다가 세브란스 병원에 가봐야 되겠다고 해서 거기도 갔다 왔다.
그러는 중에 썩어 들어가야 할 살이 썩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벌겋던 부분도 차츰 없어지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치료가 되고 있었다. 점점 아픈 게 덜해지고, 살도 희어지자 그는 돈을 요구했다. 얼마를 원하느냐고 하니까 1천200만 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지나친 요구라 대응하지 않자, 그는 내가 병원을 정리하고 선교사로 나가기로 작정을 한 것을 알아내 그걸 빌미 삼아 나를 괴롭혔고 결국 몇 백만 원을 받고 잠잠해졌다.
나는 일련의 사고들을 겪으며 생각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선교사로 안 나가니까 생기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세 가지 큰 사건을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마치 나를 사각의 링 위에 올려놓으시고 이리저리 치고 계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