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순교자들 (4) 김철훈 목사 ②

Google+ LinkedIn Katalk +

열심히 공부, 상급학년 때 종교부장 뽑혀

모진 고문에도 일경의 요구에 끝까지 침묵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보통학교를 졸업한 김철훈은 서울에 상경하여 고학하기로 결심했다. 고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평 일대를 전도하던 곽안련 선교사가 평양신학교 교수라는 소식을 듣고, 평양 모란봉 가까이에 있는 양촌 곽안련 목사 댁에 찾아가 학업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김철훈은 선교사 집에서 심부름하면서 학교에 다닐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명문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향학의 소원을 이루었다.

김철훈은 제24회로 숭실중학교를 졸업했고, 숭실전문학교 철학과에 진학한 것은 1928년 24세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으며, 교내 각종 활동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해서 상급학년 때는 종교부장으로 뽑혔다.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한국의 지성인들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높여갔다. 민족독립 운동을 하던 주체들이 망명하자 국내에서의 저항운동은 학생들이 맡았다. 1926년 6월 10일 일어난 6·10 만세운동과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의거는 반일본,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의 한 표본이 되었다. 광주학생의거 때 김철훈은 숭실전문학교 2학년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는 나주를 오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싸움이 항일운동으로 번져 전국에 파급되어 평양까지 왔다.

그해 12월 초순의 어느 새벽, 학생들이 자고 있던 기숙사에 조만식 선생이 찾아왔다. “지금 광주학생사건으로 전국은 들끓고 있는데 숭실은 자고 있는가?” 그 음성을 들은 후 김철훈, 강태국, 박준용, 박태기 네 사람은 당시 잠들어 있던 평양 사회를 깨웠다.

그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여러 학교 정문에 붙였다. 그리고 이날 최초로 숭실전문에서 학생들은 시험에 불응하고 백지 답안을 제출하고 휴교했다. 이것이 시호가 되어 광성고보, 평양여고보, 숭인학교, 평양농업학교, 숭실중학교 등에서 휴교사태가 잇따랐다.

평양에서 번진 학생운동은 방학으로 잠잠해졌으나 개학과 동시에 술렁거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1930년 1월 12일 다시 격문이 살포되더니 1월 21일 숭실전문학교를 필두로 전교 학생 600여 명이 참석하는 만세시위로 바뀌었다. 10여 개 학교가 동참한 평양 거리는 만세 물결로 가득했다. 이 일로 140명이 검거되었고, 김철훈과 강택민은 검사국에 이송, 1개월간 수감되었다.

일본 경찰은 출동하여 거리에 나온 학생들을 체포했고, 주모자를 색출했다. 김철훈 학생은 강태국 학생과 주동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2차로 검사국에 이송된 김철훈과 강태국은 기소유예로 출옥되었다.

한 달여 동안 지낸 평양의 감옥은 몹시 추웠다. 김철훈은 과거 아버지가 겪은 3년 8월의 긴 영어 생활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견디었다. 그때 김철훈은 모진 고문을 하면서 공모자를 대라는 일경의 요구에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숭실전문대학 졸업을 앞둔 김철훈은 장래 의사가 되어 낙후된 한국 의료계에서 봉사하는 것이 희망이었으나 곽안련 선교사의 권유로 목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1932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