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순례길] 여수 애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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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 다른 선교사들이 보여준 한센인 사랑”

애양원에 담긴 섬김과 희생, 복음 통한 진정한 소망 사유

애양원 정문에 선 손양원 목사

19세기말 조선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보건위생은 몰락해가는 국가의 현실과 함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전염병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절망감을 느끼게 했다. 질병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이니,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관리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선교사들이 입국할 즈음에 한반도에서 창궐했던 콜레라와 장티푸스는 이 나라 국민을 죽음의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 중에서도 미래가 없는,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태로 쫓겨나 버려진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상 통계가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 밖에 없지만 현실적으로 시설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수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한센환자들이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다가 저주받은 자로 낙인이 찍힌 채죽어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한센병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이해도 없었던 터라 두렵기만 했고, 저주받은 병으로 환자들을 집에서, 마을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센환자들은 병과 싸우면서도 버려진 처지를 생각하면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조차 허락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당시 조선 땅에서 그들을 돌보아 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서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으로 찾아들어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연명하는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주로 공동묘지나 산속에 토굴을 파거나 움막을 짓고, 또는 자연동굴에 숨어서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다.

선교사들의 손길로 시작된 애양원

애양원이라는 말을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은 한센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애양원에 정착하기까지,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삶을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까지 그들을 섬긴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애양원은 본래 여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시작은 1909년 전남 광주에서 사역하고 있던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선교사가 급성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그의 치료를 위해서 윌슨(Robert Manton Wilson) 선교사가 목포에서 사역하고 있는 포사이드(Willy H. Forsythe) 선교사를 급하게 불렀다. 전갈을 받은 포사이드는 급하게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길에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한센환자였다. 그녀를 자신이 타고 있는 조랑말에 앉히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에 도착했다.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오웬 선교사는 이미 별세했다. 비통한 상황에서 자신이 데리고 온 한센인을 극진히 살폈지만 그 여인도 별세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한센환자를,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안아 말에서 내릴 뿐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치료하고 있는 현장을 지켜본 조선 사람들에 의해서 그 사실이 소문이 났다. 당장 치료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기에 주변에 있는 벽돌을 굽는 가마터에서 선교사들이 사용하는 옷가지와 생활에 필요한 침구 등을 준비해서 치료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치료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별세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 사들의 희생적 사랑이 알려졌고, 또 하나는 절망 중에 있는 한센환자들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한센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어나자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선교사들의 모습에 감동한 최흥종이라는 이가 자신의 땅에 치료소를 세울 수 있도록 했다. 그곳에 1911년 세 칸짜리 초가를 마련해서 7명의 환자를 수용하게 된 것이 현재 여수 애양원의 시작이다. 하지만 다시 문제가 된 것은 한센환자들이 찾아들자 주민들의 님비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저주 받은 병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센환자들이 주민들과 접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선교사들은 1912년 외곽인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한센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해서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것이 한센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으로 발전한 첫 사례이다.
이 병원은 영국 에딘버러 구라협회(인도-동양구라회 본부)에서 보내준 헌금으로 마련한 것으로 광주나병원으로 명찰을 달고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환자들은 600여 명에 이르렀고, 500평 규모의 병원은 더 이상 수용이 불가능했으며, 이렇게 많은 한센환자들이 모여든 것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도 적지 않았다.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조선총독부도 나서서 이 병원을 무안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탑

한센환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랑 줘

더 이상 광주나병원이 기능을 할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가 되었고, 조선총독부도 더 외진 곳으로 옮기도록 했기 때문에 병원을 책임지고 있던 윌슨 선교사는 이전할 곳을 찾던 중 현재 애양원이 자리하고 있는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신풍반도)였다. 이곳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윌슨 선교사는 남장로교순천선교부 적립금 1만 8천200달러, 광주나병원 부지 매도금 1만 달러, 총독부 지원금 1만 2천500달러, 미국인 독지가 비더울프(Biederwolf Leper Colony) 5만달러의 예산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기금을 가지고 이곳 부지를 마련했고,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1926년 이곳에 14만 평의 부지를 확 보하고 집을 지으면서 이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한센환자들의 이주를 반길 리가 없었다. 따라서 약 2년에 걸쳐서 자립생활을 하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사(病舍)를 지으면서, 지어지는 대로 한번에 10~20명씩 광주에서부터 이곳까지, 그것도 밤에만 걸어서 꼬박 사흘이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26년 시작한 730여 명의 이주는 1928년에야 마무리되었으니, 형용할 수 없는 대장정(?), 그것은 피눈물 나는 이주의 역사였다. 이렇게 이주를 마무리한 다음 이 병원이 지어질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비더울프의 이름을 따라 ‘비더울프 나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만큼 그의 기부금은 조선의 한센환자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원장인 윌슨 선교사에 대한 마음도 뜨거웠기에 일반적으로 윌슨요양원이라고도 불렸으나 그것은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애양원 이름 사용 시작

비더울프 나병원으로 불리던 것을 1935년에 이곳에 머물며 치료 받거나 생활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공모한 명칭이 지금의 애양원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애양원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애양원의 중심인 병원은 현재 병원으로 사용하는 건물을 1967년에 새롭게 짓고,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던 건물에서 옮겼다. 그 후 1977년과 1990년 두 차례 걸쳐서 확장공사를 하여 현재의 병원 건물이 되었다. 또한 한센병이 피부병인 만큼 현재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병으로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피부과, 내과 진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애양원 하면 병원이나 교회를 생각하거나 손양원 목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애양원 경내에는 병원을 비롯해서 여러 개의 건물이 있다. 애양원병원 뜰에는 4명의 기억되어야 할, 그리고 한센인들과 그 가족들, 또한 그들과 함께 일했던 이들 모두가 기억하고 싶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그 4명은 다음과 같다.

초기 한센환자 치료 동기 마련

초기에 한센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동기를 마련해주었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하기를 원했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첫번째 비석의 주인공이다. 그는 정작 자신이 풍토병에 걸려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미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조선의 한센환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을 위해 강연을 하면서 활동하다가 1918년 별세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광주나병원 한센환자들과 치료를 받은 음성환자들이 구걸해온 돈으로 1926년 직접 비석을 세웠다. 그 기념비는 광주나병원이 이곳 여수로 이전하기 시작한지 4일째 되던 날에 세워졌고, 여수로 이전하는 기간이 2년이나 걸렸으니, 최종적으로 이사하는 마지막 이삿짐은 포사이드의 비석이었다. 따라서 포사이드의 비석은 한센인들과 함께 광주에서 이곳을 이주한 셈이다.
두 번째는 초대원장이며 이곳으로 애양원을 옮기는 전과정과 마지막까지 이곳 한센인들의 소망이 되어준 윌슨 선교사의 기념비인데, 이것 역시도 한센인들의 뜻을 모아서 세워진 것이다.
그 다음은 보이어(Kenneth Elmer Boyer) 선교사, 그리고 토플(Stanley Craig Topple) 선교사이다. 보이어 원장의 뒤를 이어 1965년에 10대 원장이 된 그는 1959년에 내한하여 1981년 은퇴하고, 다시 마지막 생애를 선교 현장에서 마무리하고자 아프리카로 떠날 때까지 22년을 이곳에서 환자들을 지켰다. 이러한 이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비석군이 병원 경내에서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밖에 애양원박물관(첫 번째 병원 건물), 토플하우스(1965년에 신축하여 한센인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로 사용), 손양원 목사가 이곳 한센인들을 목회했던 애양원교회이다. 그리고 애양원교회를 지나서 도성마을 안쪽으로 가는 언덕 끝에 손양원 부자의 묘지와 기념관이 있다.
많은 경우 애양원병원도 지나치고 교회와 손양원기념관을 찾아보고 마는데, 현재는 리모델링을 해서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펜션으로 사용되는 건물들(이 건물들이 한센인들이 사용하던 病舍)을 살펴볼 것과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음성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마을을 지나 반도 끝에 있는 북망산까지 걸어보면 애양원에 담긴 섬김과 희생, 복음을 통한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좋을 것이다.

토플하우스, 한센인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쉼터로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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