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통한 삶과 믿음이야기] 상념(想念)을 넘어 딛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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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서는 자주 피곤함을 느낀다. 몸이 약해서인지 읽던 책을 잠시 덮어두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우리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서 공사를 하는지, 덤프트럭 한 대가 뿌연 연기를 일으키며 어디선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트럭은 흙을 가득 싣고 어디론가 또다시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런데 그 먼지는 얼마가지 못해 흔적 없이 땅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인생도 저런 것이려니…’ 언뜻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막연히 살아간다. 그런 중에 마침내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이렇게 먼지만 잔뜩 일으켜 놓고는 떠나가면 어찌 되나. 이것이 우리네 삶이다. 인생은 너무 허무하다. 무가치하다 함이 맞을지도 모르리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니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인류는 유사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이론을 전개해 왔다.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진정 가치가 있다. 학자들의 근거에 의한 학설이나, 철학이 내세운 논리나, 예술가들이 내놓은 주장, 모두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종교의 진리는 최고의 경지다. 

나는 올해 초부터 시도 때도 없이 졸림이 한없이 밀려온다. 지난밤 수면에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너무 심하게 졸려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기까지 했다. 매일같이 커피로 잠을 내쫓고 있으니, 그 원인을 찾아 치료하기 위해서 동네 내과의원을 찾아갔다. 혈액 검사 등 의심되는 부분을 모두 진단해 봤으나 이상이 없기에 어찌할 수 없이 지금도 계속 카페인으로 심한 졸림을 몰아내고 있다. 심상치 않다. 언제 죽음이 다가올지 모르는 심정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보다 나은 죽음이 될지를 조용히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세상을 사는 동안 수고하고 번민하다가 인생의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생의 종말은 다르다. 무신론자들은 죽음에 대해 인생의 최종 종말로 여긴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죽음을 절대적으로 새로운 삶의 출발로 보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과 지옥의 갈림길은 최종 심판의 결과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무신론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신론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내세를 무시할 수 없음이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최종 심판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나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느니라.” (롬 8:26)

이 말씀에 의존할 때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가 이 순간 나를 위로한다. 기도에 더욱 힘써야겠다. 이 마음을 심중에 새기면서 오늘도 생활해야겠는데 이 결심이 무너질까, 조심스럽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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