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만이 진리라고 고집… 진리에 귀 기울여 개종
그런데 떠나는 이들을 가로막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전주성을 벗어나려고 할 때 유생이 돌을 던졌지만 몸에 맞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전주 읍내에 있는 아이들은 처음 보는 서양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해서 졸졸 따라다니면서 옷자락을 몇 번이고 만져보곤 하였다.
유생들과의 첫 대결
그 머나먼 전주 선교 여행길을 마치고 귀경한 테이트와 전킨 선교사는 곧 서울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에게 전주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여러 선교사들은 테이트 선교사 남매를 전주에 상주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2월에 테이트 선교사 남매는 서울을 떠나 전주에 도착하였다.
메티 테이트 여선교사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보는 것마다 신기하였다. 그러나 테이트 선교사는 이미 전주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에 자신이 떠맡은 선교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에 힘썼다. 이들 남매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주에 안착하였다.
이미 전주 성문 밖 은송리 마을에서도 선교사가 정착을 하고 서양문화를 전해 준다는 말에 모두들 들떠 있었다. 더욱이 지난날에도 남자 선교사 두 분과 그를 돕는 여러 심부름꾼들이 왔었지만 이번에는 여자 선교사도 끼여 있었기에 모두들 신기하고 놀라워했다.
은송리에 사는 부녀자들은 메티 테이트 선교사의 용모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예쁘고 잘생긴 여자는 처음 보았다면서 그 소문이 전주성 안 전체에 퍼졌다. 사실 메티 테이트 여선교사도 심부름꾼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밖에 나가 전도하고 싶었지만 구경 온 사람들을 영접하느라 밖에 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메티 테이트 선교사 집에는 매일같이 수십 명씩 부녀자들이 몰려왔다. 이러한 관계로 메티 테이트 여선교사는 거리에 나가 선교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방문하는 전주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여러분, 저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해야 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을 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복을 받고 잘 살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은송리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기에 무당들이 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준다면서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굿을 해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당들은 서양 선교사가 와서 기독교를 전하는 일에 은근히 반대하였다. 박씨라는 사람이 은송리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이 집에는 두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해마다 정초만 되면 아이들이 이상하게 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해도 여전히 박씨네 가정에는 늘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이웃에 사는 부인이 서양 사람을 모시고 굿(예배를 굿으로 생각하였다)을 하면 우환이 싹 도망간다는 말을 전하였다.
어느 날 이 소식을 접한 메티 테이트 선교사는 그를 돕는 이들과 함께 박씨네 집에 가서 성경책을 펴들고 읽으면서 귀신을 쫓아 내기 위한 예배를 드렸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5~29).
메티 테이트 선교사는 그 집 아이를 붙잡고 열심히 기도해 주었다. 그런데 ‘아멘’ 하는 순간 그 아이가 벌떡 일어나 뛰어다니면서 귀신이 나갔다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은 은송리 마을뿐만 아니라 전주천 건너편에 있는 전주성 안까지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서양 여자가 은송리에 산다는 말을 듣고 구경을 가려고 하던 차에 귀신까지 쫓아냈다는 소문을 듣고 더 호기심이 많아지면서 메티 테이트 선교사 집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구경 온 부녀자들로 북적거렸다.
테이트 선교사는 한국인 조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은송리 마을은 물론 전주성 안까지 드나들면서 개인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때로는 유생들을 만나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유생들은 자신들이 숭상하고 있는 유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들과의 충돌은 없었다. 유생들과 마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이트 선교사의 선교로 기독교에 대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은송리에 사는 사람들은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로 인해 개종하였고, 전주교회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서울에서 레이놀즈와 드루(Dr. A. D. Drew) 선교사가 선교여행 답사차 전주에 왔다. 테이트 선교사 남매는 오랜만에 만나는 선교사들인지라 무척 반가워하였다. 이들은 1894년 3월 27일에 서울을 떠나 인천 강화도에서 출발하여 3월 30일 군산항에 도착하여 임피 대장촌을 거쳐서 은송리까지 오게 되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에서의 많은 선교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전주교회가 믿음 위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고 자랑을 하였다.
“레이놀즈 선교사님, 이번 주에는 이곳에서 설교를 부탁드립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도 어학에 재간이 있어서 한국어로 설교를 잘 준비하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런데 주일 아침 갑자기 신자들이 모이지 않았다.
“선교사님, 큰일났습니다. 밖에 나가 보았더니 양놈을 쫓아내야 한다는 벽보가 붙어 있습니다.”
“아니, 양놈을 쫓아내야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주교회 교인들은 주일인데도 예배를 포기하고 집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조사를 시켜서 인원을 동원하였지만 끝내 교인들은 나오기를 거부하였다. 할 수 없이 레이놀즈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의 두 마부와 그를 돕는 이들, 이렇게 5~6명이 예배를 드렸다.
그후 레이놀즈 선교사는 선교여행 일정에 의해 다음 장소인 금구와 김제를 향해서 떠나야 한다면서 이들의 송별을 받고 두 마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전주를 떠났다. 그리고 테이트 선교사는 조사를 대동하고 은송리 마을을 벗어나 전주 읍내를 다니며 전도를 계속했다. 역시 어느 교인이 말한 대로 “양놈을 쫓아내야 한다”는 벽보가 또렷하게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선교사님,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아니 좀더 걸어가 봅시다.”
“이러시다가 누가 와서 해코지할는지도 모릅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