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박두진 작사 6.25 노래 불러 반공정신 바로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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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두진(1916-1998)은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일제말기 정지용(1902-1950) 시인에게 시작품 ‘향현’ ‘묘지송’ ‘들국화’ 등이 ‘문장’지에 추천되어 시단에 올랐다. 이 무렵 박목월(1916-1978), 조지훈(1920-1968) 시인도 혜산 박두진과 자연심취 이미지가 같은 시인으로 광복후 청록집(을유문화사 1946) 이름으로 3인 공동시집을 내면서 문단에 청록파시인으로 불리는 시단의 한 유파를 형성했다. 

세 시인이 대학교편을 잡으며 시작활동을 했다. 박두진은 연세대, 박목월은 한양대, 조지훈은 고려대에서 강의를 했다. 박두진 시인은 6.25 전쟁 휴전 이후 1950년대 중반에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한 외솔 최현배 박사가 기독교시인 혜산 박두진 시인을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박두진은 초기에 자연심취의 시를 창작했으나 그 자연이미지에 사회비판 의식을 형상화하여 작품을 발표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42대의 탱크와 170대의 전투기를 앞세우고 따발총을 든 북한공산군 20만으로 38선을 넘어 침략해왔다. 대한민국 국군은 무방비상태였다.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되고 한강다리도 끊겼다. 박두진 시인은 대구로 피난 갔다. 6.25의 노래를 지어 김동진 작곡으로 온 국민이 반공정신 투철하게 우렁차게 불렀다. 국군의 사기도 올라갔다. 참전 16개국이 낙동강전선까지 밀린 한국전선에 참전했다. 대구 마산 진해 부산 제주도만 남고 남한 일대를 인민군이 다 점령했다. 당시 내무장관 유석 조병옥(1894-1960) 박사도 국군 못지않게 전투경찰을 동원하여 대구 사수에 최선을 다했다. 조병옥은 이 공로로 대구에서 국회 3선의원으로 선출되고 민주당 대통령후보까지 된 것이다. 

6.25 전선은 두 달 남짓 낙동강을 앞에 두고 대한 조국을 지키다가 지극히 성공 확률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원수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그 여세로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달았다.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평양이 점령되고 압록강 청진까지 진격했다. 다급한 전세에 북한 김일성(1994 작고)의 전문을 받은 중국 모택동은 중공군 30만 명을 10월 19일 미국에 항전하여 북한공산군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안동 즙안 장전 세곳에서 압록강을 건너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했다. 인해전술에 밀려 1.4후퇴를 평택까지 했다가 반격하여 전선이 37도선에서 맴돌았다. 1951년 7월 10일 휴전이 시작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통일 없는 휴전은 결사반대 했다. 한미방위동맹을 성사시키며 휴전협정을 묵인하여 북한과 미국 대표가 1953년 7월 27일 상호 조인하여 37개월의 6.25 전쟁은 총성이 멈췄다. 다시 155마일의 휴전선이 형성되고 아직도 최전선 병사가 서로 맞서고 있다. 우리는 박두진 시인이 작사한 ‘6.25 노래’를 계속 힘차게 불러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가져야 하겠다. ‘6.25 노래’ 3절 중 1절만 가사를 살펴보자.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날을/후렴)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쫓아/ 윈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우리는 박두진 시인이 지은 이 ‘6.25 노래’ 늘 불러 반공정신으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잘 지켜야 하겠다. 자유없는 북한을 떠나온 탈북민들 사랑하고 도우며 ‘6.25 노래’의 반공정신으로 자유대한을 굳게 잘 지키자. 우리는 현충일을 맞으며 서울 현충원 10여만 순국장병 영령 앞에 감사기도와 묵념을 드리자. 참전 16개국에도 늘 감사드리자.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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