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누가 나를 건져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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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한다. 경건하게 살고 싶은데 실제로는 세속적 판단과 욕심으로 살아간다. 마음으로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따라서’가 옳은데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 있는지 따르지 못한다. 영적(靈的)으로는 주님만 사랑하고 따르고 싶은데 나 자신을 더 우선한다. 

청교도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 1662~1714)가 말했다. “타락한 본성이 있는 한 선(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바닷가 바위 위에서 옥수수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새로운 본성은 어떻게 해서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육에 속한 정욕과 탐욕 곧 옛 본성은 어떻게 하든 선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게 한다. 사도는 자기가 자신을 보았을 때는 타락한 본성이 따라다니기에 자기는 비참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영혼은 속 사람이다. 새 사람을 가리켜 속 사람이라고 한다. 사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을 드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본 회퍼(D Bonhoeffer, 1906~1945) 목사의 지적은 옳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긴 하지만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나 같이 죄악 되고 무지몽매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셔서 자녀로, 제자로 삼아 주셨다. 낙심(落心)이 되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만 붙잡고 의지하는 믿음, 하나님의 뜻을 배역(背逆)하지 않을 수 있는 영적인 능력, 사탄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영적 권능을 갖기를 원하며 기도한다.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깨끗하게 씻어져야만 하고 거룩하게 성화 되어야만 한다. 신앙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삶의 지배적 원리,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지 못할 죄악은 없다. 죄인 중의 괴수(魁首)라 할지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사함 받지 못할 죄’가 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죄이다. 사죄(赦罪)의 은총을 구하지 않는 죄이다.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 맞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했던 사람들까지도 용서함을 받았다. 오순절 이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아와 “우리가 어찌 할고!” 회개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회개와 성결(聖潔)과 믿음의 삶이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즉시 “그가 일어나 주를 좇았다.”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썩어져 가는 세상 욕심에 빠져서 육체의 소욕 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도 부르신다. 성경을 통해서, 양심을 통해서도 부르신다. 때로는 두려움을 일깨워서 부르신다. 여호와의 음성은 능력있게 역사(役事)하신다.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변절자, 가룟 유다를 열두 사도로 선택하신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순수성과 무죄성, 무오성(無誤性, Inerrancy)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준다. 대제사장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가룟 유다가 불리하게 증언할 수 있는 조건이 예수님께 있었다면 서슴없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주님께 불리한 아무 증언도 하지 못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주님께 대하여 부정적으로 증언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주님께 잘못이나 모순이 있었다면 가룟 유다가 증언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를 건져 주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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