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번째 선교지인 네팔로 출발하기 전에 전주 예수병원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각각 한 달씩, 당시 최첨단이라고 알려진 의학 분야에 대해 소개받는 연수에 참가했다. 오지에 의료 선교사로 가는 것이니 의술에서는 최선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의료 선교사는 선교사이기 전에 의사로서 경험과 실력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의사로서는 어느 정도 준비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교사라는 측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선교사로 떠날 때 아쉬웠던 것 중 하나는 선교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점이다. 한국과 네팔이 수교를 맺은 것은 1974년이었지만, 그때까지도 네팔에 관한 책이 별로 없었다. 요즘처럼 인터넷 시대도 아니어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정부 기관까지 찾아갔으나 별 소득이 없어서 집에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네팔 항목을 참고했을 정도다.
이래저래 현실의 나는 좌충우돌 우왕좌왕이었다. 처음 선교사로 떠나는 날부터 허점투성이였다. 미국월드컨선선교회 본부에서 내게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었는데, 그 짐의 무게가 얼마인지 염두에 두지도 않고 공항에 갔다가 초과된 무게에 대한 요금을 더 물어야 했고, 공항 매점에서 가방을 더 사야 했다. 여행자가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 무게에 한계가 있다는 기본 상식조차 몰랐던 것이다. 준비하는 단계와 시작하는 날부터 식은땀 나는 경험을 수없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같이 무지한 사람을 인도하셔서 선교지에 적응하게 하셨고, 지혜와 능력을 더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게 해주셨다.
1982년 8월, 나는 드디어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태국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에는 네팔까지 직항로가 없어 태국을 경유해서 가야 했다. 그런데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 한국월드컨선선교회 사무실에서 만난 미국본부의 인사과장 빅터 씨가 태국 지부와 통화하던 내용이 기억났다. 나는 무작정 택시를 타고 기억 속의 호텔 이름을 대며 거기로 가자고 했다. 역시 호텔에는 내 이름으로 방이 예약되어 있었다. 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9시였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선교회 태국 본부에 전화를 했다. 한참 만에 누군가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금 몇 시인지 아십니까?”
“9시 아닌가요?”
“7시입니다.”
2시간의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점심 때가 되어 태국본부 선교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나에게 식사 기도를 시켰다. 영어로 식사 기도를 하기는 난생 처음이라 땀을 흘려가며 간신히 마쳤다.
이튿날 네팔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마치 우리나라의 시골 역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뉴질랜드에서 온 해리 씨가 나를 마중 나와 카트만두에 있는 INF(International Nepal Fellowship) 선교회 소유의 숙소로 데리고 갔다.
네팔에 도착한 처음 6개월은 선교회 소유의 공동 거주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언어를 배웠다. 선교 현장에 가면 가장 먼저 언어를 배우고, 사람을 사귀고, 집을 구한다. 이후에는 현지인의 집에 방 한 칸을 세를 얻어 자취를 했다. 숟가락 없이 세 손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도 익혀야 했다. 물과 전기가 부족한 것은 일반적이다. 네팔 사람들에게는 난방 문화라는 것이 없어서 추위를 견디기가 아주 힘이 들었다. 네팔의 여름 더위를 이겨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대학 입시 전후의 아이들 때문에 한국에 남았다가 1년 후에 네팔로 온 아내는 내게 곰 같다고 했다. 아내 덕분에 선풍기 한 대를 사서 간신히 더위를 식혔다.
맨 처음 선교사로 나가 40대 후반에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일도 참으로 어려웠다. 쓸만한 교재도 없이,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했다. 비팔어, 신할리어(스리랑카), 벵골어(방글라데시) 다 배웠지만 에티오피아에 들어가기 전에 배웠던 ‘암하라어’처럼 어려운 말은 없었다. 글자 모양이 마치 춤추는 사람 같은 데다 인칭과 시제에 따라 앞뒤에 붙는게 다 달랐다.
의료 선교사이니 진료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나는 병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료만 보는 의사보다 언어에 더 익숙해야 했다. 방글라데시에 있을 때였다. 병원 이사회가 열리면 영어를 사용하던 현지 관리자들이 회의 중간쯤 되면 벵골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회의가 끝나면 나도 모르는 내용이 결정 사항이라고 발표되기 일쑤였다. 언제 결정된 사항이냐고 물으면 “그때 너도 있지 않았느냐”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일 때문에라도 그 나라 말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착실하게 복습과 예습을 했다. 하루에 예닐곱 시간을 무리해서 언어 공부를 하다가 심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